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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수 |
韓聖洙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사리 770 / |
이명 |
- |
형량 |
무죄 |
생몰년도 |
1881. ~ 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서탄면 사리(현 평택시 서탄면 사리) 사람이다. 1919년 그는 진위군 서탄면의 서기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탄면의 면장 윤기선이 서기인 한성수에게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키라. 만일 불참하면 뒤에 큰 환(患)이 있으리라.’라는 문서를 각 구장에게 전달하고 4월 2일 오전 10시 서탄면 주민을 인솔하여 서탄면사무소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계획을 논의하였다. 한성수는 윤기선의 만세시위운동의 취지에 동의하여 윤기선과 공모한 뒤 4월 2일 새벽3시경 서탄면사무소에서 3·1운동의 목적을 작성하여 문서를 만들고, 면 소사를 시켜 각 구장에게 송달하였다. 이 문서를 보고 40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치안 방해, 보안법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경성지방법원에서 1919년 6월 17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관련자료
「한성수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6.17.)
金正明 編, 大正8年4月11日 高第11014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44報)」 , 『朝鮮獨立運動』Ⅰ, 1967년, 5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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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
韓永洙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168 / |
이명 |
韓泳洙 |
형량 |
징역 8월 |
생몰년도 |
1891.01.16. ~ 1939.05.10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건국포장 |
오성면 양교리(현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병남면 평택리의 평택역 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의 이도상과 심헌섭, 비전면 흡정리의 목준상과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한영수는 동지와 함께 평택 장날인 3월 11일을 만세시위 날로 정하고 평택역 앞 광장을 만세시위 장소로 결정하였다. 3월 11일 한영수는 평택역 앞에 집합한 약 150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12명과 함께 체포된 한영수는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았다. 1939년 5월 10일 사망했다. 2006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한영수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4.11. 경성복심법원: 1919.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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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석 |
韓元錫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금각리 /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 92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02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서탄면 금각리(현 평택시 서탄면 금각리) 사람으로 경성부 가회동에 거주하며 수은인쇄소(授恩印刷所)와 창문사(彰文社)의 직공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1924~25년 경인쇄직공동맹에 속하여 활동하면서 1924년 8월 17일 전일(全一)이 중심이 되어 무산노동자의 단결, 공산주의 신사회건설을 목표로 조직된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여 그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5년 8월 14일 9시간 노동제와 상여금 지급을 요구하는 대동인쇄소의 파업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한원석은 ‘강박 급 업무방해죄’로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얼마 후인 8월 27일 이병각, 강균환과 함께 풀려났다. 1925년 9월 4일 오후 8시 경성부 와룡동 천도교연합회의 사무실에 모여 경성무산청년회, 조선노동당, 화요회, 경성 무산청년동맹, 북풍회를 합동하여 노동자구락부기성회를 조직하였다. 당일 그는 선전부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25년 10월 16일 조선노동당 제5회 집행위원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참석하여 조선노동당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격문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관련자료
「동맹파업직공의 동정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25.08.14.).
「노동자구락부기성회의 건」(1925.9.5.),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 1』.
「조선노동당의 내홍에 의한 폭행의 건 속보」(1925.9.28.),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 1』.
「조선노동당 제5회 집행위원회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25.10.18.).
「사상요시찰인연명부 추가의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26. 04.19).
『시대일보』 1925.8.30., 2면, <파업공 3명 방면>.
『동아일보』 1932.5.10., 2면, <노동제 격문 진범을 엄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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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택 |
韓俊澤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현덕면 대안리 1226 (출생 및 본적) /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 41(주소)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16.02.20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1916년 진위군 현덕면 대안리(현 평택시 현덕면 대안리) 사람이다. 안중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1년 경 서울로 올라와 운니동에 거주하며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중앙고등보통학교는 조선인 교사의 배척 문제 등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다수의 동맹휴학을 벌였던 학생운동이 강한 학교였다. 1933년 3월 권우성(權又成)은 반전격문을 배포하였고, 한동정(韓東正), 양승언(梁承彦), 유연(柳衍) 등은 비밀리에 반제운동을 목표로 여론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1933년 6월 중앙고보 반제동맹(반제운동전교오르그위원회)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한동정을 총잭임자로, 갑조 책임자을 한동정, 을조 책임자를 양승언, 병조 책임자를 유연으로 정하였다. 한준택은 1934년 경 한동정이 이끄는 ‘4년생 갑조 오르그’ 중에서 이준규(李浚圭)가 이끄는 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반전사상을 확산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동맹휴학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통치체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35년 2월 20일 중앙고보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동년 2월 21일 치안유지법 및 폭력죄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아 곧 석방되었다.
출감 후 일본 동경으로 가서 욱문관중학교(郁文館中學校)를 졸업하고 동경물리학교 물리학부를 졸업하였다. 1954년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6년 미국 캔자스주립대학교 대학원 방사선물리학과에 입학하여 3년 뒤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 원자력연구소 연구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창설하여 발전시키고, 한국물리학회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관련자료
『동아일보』. 1935.02.22. 2면, <中央高普四年生駭擧 百二名을 總檢擧>.
『동아일보』, 1935.05.04. 2면, <中央高普生事件 卄七名, 今朝送局>.
『동아일보』, 1935.05.14. 2면. <中央反帝同盟事件 十五名읜 昨夜釋放>.
「중앙고등보통학교 생도의 폭행사건에 관한 건 1」(1935.2.23.), 『경찰상보(1935)』.
「중앙고등보통학교 생도의 폭행사건에 관한 건 2」(1935.2.23.), 『경찰상보(1935)』.
「중앙고등보통학교 생도의 비밀결사사건에 관한 건」(1935.4.4.), 『경찰상보(1935)』.
「사립 중앙고보교 생도의 폭생에 관한 건」(1935.4.20.), 『경찰상보(1935)』.
「비밀결사 중앙고보 반제운동 전교오르그위원회사건 검거에 관한 건」(1935.5.22.), 『경찰상보(1935)』.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한준택). 평택군지편찬위원회, 『평택군지』, 1984,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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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표 |
洪建杓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금각리 741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06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서탄면 금각리(현 평택시 서탄면 금각리) 사람이다. 1931년대 초 수진농민조합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수진농민조합은 1930년 3월 10일 진위군 북면 야막리 박규희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수원과 진위의 2개 군에 걸쳐 창립된 수진농민조합은 수원과 진위가 황구지천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어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경제적으로나 생활권의 차원에서 보면 동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2개 군에 걸쳐 조직될 수 있었다. 수진농민조합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1931년 2월 집행위원회를 열었으며, 강우형을 의장에 선출한 후 박승극, 남상환, 김영상, 박두희 등을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조직을 재정비한 수진농민조합은 소작쟁의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에 일제는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을 탄압하고 감시를 삼엄히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영상은 남상환과 함께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심인택을 찾아가 농민운동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수진농민조합은 적색농민조합으로 성격을 바꾸게 된다. 수진농민조합을 적색농민조합으로 바꾸기 위해 김영상은 조직원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조직을 정비한 후 농조의 확대, 강화를 위한 활동에 들어가 지부조직을 위해 소작쟁의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수진농민조합은 투쟁을 통한 조직방침을 세웠다. 이들은 투쟁을 통해 민중의 정치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농조의 확대, 강화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이러한 조직방침 아래 수진농민조합은 1931년 10월 용소리와 황구지리에서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특히 김영상은 황구지리에서 일으킨 소작쟁의를 정치투쟁으로 이끌기 위해 투쟁방침을 협의하기도 하였으나 황구지리 소작쟁의를 계기로 일제에 조직이 노출되게 되면서 그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홍건표는 1931년 수진농민조합의 소작쟁의 시 주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932년 1월 15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관련자료
『중앙일보』, 1932.01.16. 2면. <수원농민조합사건 박승극등 5명 기소>
『매일신보』, 1932.09.07. 7면. <농민적화계획코자 비밀결사를 조직, 송국이래구개월만에 징촌예 심판사가 출장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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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성 |
洪奇成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 |
이명 |
- |
형량 |
징역 6월 |
생몰년도 |
1884 ~ 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현 평택시 청북읍 백봉리) 사람이다. 1919년 백봉리지역의 3·1운동에서 선두에 서서 마을 사람들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홍기성이 36세가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청북면 토진리 뒷산인 오봉산과 마루산(무성산), 청북면 신포장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어서 4월 1일 안육만이 청북면 백봉리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자, 홍기성은 안육만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의 선두에 서서 마을사람들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홍기성은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에 처해졌다. 2012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홍기성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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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태 |
洪淳台 |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현 평택시 죽백동)/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93 ~ 1920.8.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일대에서 이유석·홍창섭·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4월 1일 오후 8시경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던 원곡면 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일본인 면장을 끌어내어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고, 양성면과 원곡면내의 경찰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자를 축출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 9시 30분경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9시 50분경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하여 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오후 10시경 다시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 때 그는 짚이 없어서 주재소를 방화시키기가 어려움을 알고, 주재소에서 5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짚을 가져다가 홍근배(洪根培)와 함께 처음으로 건물과 기물에 방화하여 다른 군중들로 하여금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사기가 오른 만세시위 군중과 계속적으로 양성 우편소와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습격하고, 양성면 사무소의 건물과 기물을 파손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까지 양성면 일대에서 시위를 계속하다 원곡면으로 되돌아 와서, 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달려가 서류와 집기류를 불태워 버리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순태는 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맞아서 부상을 당하고 1920년 8월 죽었다고 한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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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로태 |
黃魯泰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 포승면 신기리 141번지 / |
이명 |
황린대 |
형량 |
- |
생몰년도 |
1861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포승면 신기리(현 평택시 포승읍) 사람이다. 황로태(黃魯泰, 51)는 포승면 희곡리 530번지에 거주하는 이민중(李敏仲, 19), 병남면 합정리 156번지에 거주하는 이종국(李鐘國, 32), 청북면 덕좌리의 이기학(李起鶴, 27), 입덕면의 황준재(黃俊在, 33), 경성 황금정의 황인재(黃仁在, 23)는 1921년 경 경성 수송동에 거주하는 임운승(林雲乘, 57) 등과 함께 총 13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단장은 황로태, 부단장은 이종국이었다. 황로태는 경성 수송동에 동거하고 있는 이민중, 이종국으로 하여금 등사판에 임시정부 특파원의 명의로써 독립문서를 만들어서 4월 14, 15일 경에 우편으로 평택에 보내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편검열로 곧 발각되었고 평택경찰서에 체포되어 11명과 함께 수원검사국에 송치되었다.
※ 신문에는 황로태의 본적지가 포승면 新基里로 나오는데 이는 신영리 혹은 내기리의 오기를 보인다.
관련자료
『매일신보』 1921.05.02. 3면, <不穩文書를 郵送한 조선독립단장 외 11명을 평택에서 잡아 검사국>.
『독립신문』 1921.05.14. 2면, <피착사건일속>.
『매일신보』 1925.10.3. 2면, <서문서에 고소된 삼만원대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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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태 |
黃順泰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 309 / " |
이명 |
- |
형량 |
징역 6월 |
생몰년도 |
1889.06.26. ~ 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평택시 오성면 안화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화리의 3·1운동을 계획, 주도하였다. 황순태가 살고 있는 인근지역까지 만세시위운동이 발발하였다. 황순태는 최만화와 안선문(安善文)·정수만(鄭水萬)·홍기성(洪奇成) 등과 함께 안화리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백봉리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황순태는 치안을 방해하였다는 죄로 1919년 5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관련자료
「황순태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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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재 |
黃仁在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현덕면 /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현덕면(현 평택시 현덕면) 사람으로 경성부 황금정에 거주하였다. 1921년 봄 진위군 현덕면 거주 황준재와 함께 경성 수송동 사는 조선독립단장 황로태(黃魯泰)와 동 부단장 이종국(李鍾國) 등의 밀사가 되고, 경성 수송동에 사는 임운승(林雲乘)의 전령원이 되어 임시정부 특파원의 명의로 진위군 경내의 부호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21년 4월 평택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송국되었다고 한다.
관련자료
『매일신보』 1921.5.2., <불온문서를 우송한 조선독립단장 외 11명>
『독립신문』 1921.5.14., <피착사건일속>.
『신한민보』 1921.6.30., <평택독립단사건>.
『시대일보』 1925.10.3., <서문서에 고소된 삼만원대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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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재 |
黃俊在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현덕면 / 경기도 진위군 현덕면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현덕면(현 평택시 현덕면) 사람이다. 1921년 봄 경성 황금정 사는 황인재와 함께 경성 수송동 사는 조선독립단장 황로태(黃魯泰)와 동부단장 이종국(李鍾國) 등의 밀사가 되고, 경성 수송동에 사는 임운승(林雲乘)의 전령원이 되어 임시정부 특파원의 명의로 진위군 경내의 부호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21년 4월 평택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송국되었다고 한다.
관련자료
『매일신보』 1921.05.02. <불온문서를 우송한 조선독립단장 외 11명>
『독립신문』 1921.05.14. <피착사건일속>.
『신한민보』 1921.06.30. <평택독립단사건>.
『시대일보』 1925.10.03. <서문서에 고소된 삼만원대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