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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현 |
安九鉉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164 / ″ |
이명 |
- |
형량 |
징역 7년 |
생몰년도 |
1888.12.13. ~ 1970.03.22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애국장 |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현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사람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원으로 활동하였다.
안구현은 경성으로 상경하여 활동하다가 1905년 귀향하여 노비를 해방시키고, 다시 1912년 인천 제물포로 이주하여 영국인 선교사와 수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명을 받고, 1920년 2월 18일 오후 11시 경 고향의 동지인 오창선, 이택화와 함께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의 부호 김태연(金台淵) 집을 찾아가 군자금모금지령서를 보이고 1만원을 모금하려고 하였다. 당시 오창선은 망을 보고 안구현은 이택화와 함께 김태현의 방으로 들어가 “자신들은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이다”라고 말하고 100원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0일 이택화 및 오창선이 진위군 포승면 내기리 이민화(李敏和)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간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안구현은 1920년 4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4년 11월 26일 형(刑) 변경으로 출옥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안구현 판결문」(경성지방법원 : 1920.04.28.).
평택시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평택시독립운동사』, 2004, 316~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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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육만 |
安六萬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 180 / |
이명 |
安隆萬 |
형량 |
- |
생몰년도 |
1900.10.20. ~ 1980.01.23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현 평택시 오성면 안화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청북면 백봉리 도로에서 김원근(金元根)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할 것을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일은 경기도 진위군의 병남면 평택리 평택역 앞에서 3,0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와 더불어 부용면(芙蓉面), 고덕면(古德面), 북면(北面) 등지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안화리 180번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안육만은 1919년 4월 1일 저녁에 김원근(金元根)과 함께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도로에서 큰소리로 “이 마을에서는 어찌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빨리 나와 부르자.”고 하여 사람들을 모아 최만화(崔晩華), 안희문(安喜文), 황순태(黃順泰), 정수만(鄭水萬), 홍기성(洪奇成) 등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마을에서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5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을 선고받고 7월 5일, 8월 21일 각각 공소와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8일 석방되었다. 1983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안육만)」.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안육만)」.
「안육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경성복심법원: 1919.07.05., 고등법원: 19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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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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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646 / 경기도 경성부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92.11.30.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 동조) |
포상훈격 |
- |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사람이다. 평택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안재홍의 동생이다. 1920년대 후반 경신학교 교무주임으로 물리학을 가르치던 그는 학생들의 신망을 받았다. 1929년 10월 경신학교 교장의 독단적 운영에 불만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퇴직을 당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 돌아온 경신학교학생 권유근의 진상보고를 허가함으로써 경신학교를 비롯한 서울의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동맹휴학 투쟁을 벌이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교수직과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조선총독부를 위해서 일할 수 없다며 평택 고덕면으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관련자료
「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2」, 국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0권,
권유근 신문조서. 「경신학교생의 동요에 관한 건」(1931.12.9.), 『사상에 관한 정보』 1.
『동아일보』 1931.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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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
安在鴻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646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91.12.30 ~ 1965.03.01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대통령장 |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사람이다. 1897년부터 집에서 글을 익혔고 1907년 평택의 사립진흥의숙을 다니다가 같은 해 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일어나자 다음 달인 9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1년 9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0월에는 도쿄에서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안재홍은 국내에서 실력양성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조직된 대한민국청년회의 총무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청년회는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임시정부에 국내 독립운동의 상황을 전달하고 기금을 송금하거나 선전활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안재홍은 총무로써 「국치기념경고문」, 「외교시보」와 같은 선전문을 인쇄해 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안재홍은 이 활동으로 인해 1919년 12월 29일 동료들과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게 된다.
1922년 6월 출옥한 안재홍은 2년간 요양한 후 1924년 조선물산장려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재기했다. 출옥 후 그의 활동은 언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시대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일보』의 주필, 이사를 역임하며 1932년까지 『조선일보』에서 조간의 사설 약 980편, 석간의 시평 약 470편을 작성하였다. 특히 1925년 4월 안재홍은 조선기자대회에서 부의장에 피선됨으로써 언론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안재홍은 1927년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의 유일당 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같은 해 6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설립대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조선일보』 사설 「보석지연의 희생」 발행 책임으로 편집인 백관수와 함께 구속되어 두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1928년 5월에는 조선일보 사설 「제남사건의 벽상관」의 집필로 구속되어 조선일보 발행인에서 물러나고 금고 8개월의 세 번째 옥고를 치렀으며 『조선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다. 1929년 12월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보고를 위해 민중대회를 하려는 것이 발각되어 검거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2년 안재홍은 만주동포재난문제협의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모금한 재만동포구호 의 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8개월간 투옥되었다.
1932년 출옥한 안재홍은 더 이상 『조선일보』에서도 활동할 수 없었고 신간회도 해체 된 뒤였다. 이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역사서술이었다. 안재홍은 조선학운동을 “차선적인 최선--아니 최선한 차선책”으로 규정하여 힘차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에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논문도 발표하였다. 안재홍은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 교호되고 조합되는 민족적 국제주의, 국제적 민족주의를 형성”하자는 주장을 하였고 이러한 의미에서 안재홍이 추구하는 조선학운동의 현실적 목표는 민족의 통합 단결이 우선하는 식민지조선의 특수성을 전재하여 계급혁명을 반대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만드는 데 있었다.
1936년 정태운 등을 중국 항주의 군관학교에 파견하기 위해 소개장을 써주었다가 발각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1년 6개월 복역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계되어 구속되었다가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가, 중국군관학교 밀파사건의 잔여형기를 치루기 위해 다시 수감되었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관련하여 체포되었으나 1943년 3월 석방되었다.
해방 후 안재홍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임시정부가 귀국하기 전 건국의 토대를 닦아놓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 되어가자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하였다. 그는 중경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건국정부 수립방안을 제시하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구체화한‘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발표하였다.
1945년 9월 국민당을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그 정당에서 급좌 급우를 모두 배격하고 국력을 통합하여 신민주주의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1946년 1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안재홍은 좌우가 협조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게 하는 좌우합작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면서 통합정부 수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수용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9월 한국전쟁 시 북한군의 납북되었다. 1965년 75세가 되던 해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1989년 정부로부터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朝鮮內 新聞紙 雜誌 發行狀況」, 1926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민족주의운동 발흥에 관한 건」, 1925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신간회 발기인회에 관한 건」, 1927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신간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 개최의 건」, 1927년 12월 11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증인안재홍신문조서」, 1925년 9월 11일
『동아일보』, 1926.03.06, 1927.01.20, 1927.06.12, 1927.12.06, 1927.12.14, 1928.05.14, 1928.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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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철 |
安鍾喆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병남면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장날인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 사거리에 모인 150명의 사람들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군문리 다리로 행진하였다. 이후 그는 소방대에 들려 종을 쳐서 만세운동의 열기를 고취하다가 출동한 경찰로부터 해산을 당하였다. 12명과 함께 검거된 안종철은 19일까지 경찰에 의해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평택지역 유력가인 안종철은 1921년 이성렬(李成烈)·유창식(柳昌植) 등과 함께 무역판매부를 신설하고 상업활동을 하였고, 1923년 병남면 비전리에서 이성열, 이종식(李鍾植) 등과 함께 ‘경제의 파멸을 다하는 우리는 自作自給하에 산업과 부업을 장려하려 한다는 목적’으로 계인조합(契仁組合)을 설립하고 조합장으로 동민의 복리를 증진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0년 이전부터 극빈자에게 다수의 구제를 해오던 중 전(前) 해의 한해로 고통을 당하던 극빈자를 위해 1,000원을 군 당국에 제공하였다.
※ 1923, 1931, 1935년 진위군 평택면의 면협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편, 高제6763호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13報)」(1919.03.12.) , 『朝鮮獨立
運動 Ⅰ』, 1967년, 352쪽.
『매일신보』 1919.03.25. 3면, <騷擾事件의 後報>.
『매일신보』 1920.05.05. 4면, <各支分局通信欄: 安李 兩氏 慈善>.
『매일신보』 1921.09.06. 4면, <平澤商組擴張>.
『동아일보』 1923.11.25. 4면, <各地選擧>.
『동아일보』 1927.04.23. 4면, <巡廻探訪(269)>.
『동아일보』 1931.6.10. 5면,<制度改正後第一次 當選面協議員>.
『동아일보』 1935.05.24. 5면, <當選된 面協議員>.
『동아일보』 1940.02.18. 7면, <세민에 천원 희사, 평택 안종철씨의 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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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춘경 |
安春京 |
본적/주소 |
수원부 태촌면 진언리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탑현리 2통 9호 |
이명 |
- |
형량 |
징역 7년, 징역 12년 |
생몰년도 |
1871 ~ 미상 |
계열 |
의병 |
포상훈격 |
포상가능 |
수원부 태촌면 진언리 출신으로 진위군 오성면 탑현리 2통 9호(현 평택시 오성면 당거리) 에 거주하였다. 대장장이로 활동하던 안춘경은 1907년 8월 당진 의병장 정주원(鄭周元)을 만나 의병에 투신하였다. 이후 안춘경은 선봉장 등으로 1907년 12월 40여명을 이끌고 수원군 광덕면(현 평택시 현덕면)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08년 음력 6월에는 문덕준(文德俊) 등 6명과 함께 수원군 청룡면 대미(현 평택시 청북면)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정주원이 해미에서 체포된 직후인 1908년 9월 정주원의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직전 안춘경은 최방해(崔方海)의 당류로 노준경(盧俊景), 정자선(鄭子先)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안춘경은 무기를 진위군 북면 대출리(大出里)의 주막 주인 최순도(崔順道)에게 맡기고 서울, 경기도 등지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그런데 1909년 9월 24일 수원군 숙성면(宿城面) 조두(朝頭)에서 체포된 정성삼(鄭聖三, 鄭子先)의 발설로 추적을 받았다. 이후 12월 6일 밀정의 보고로 소재가 알려졌고, 12월 7일 수원군 문시면(병점역에서 18丁 산복(山腹)에 있는 그의 첩의 집에서 자다가 체포되었다. 밀정 5명이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시모스케(下野鶴峽), 니시카와(西川勘作)가 체포하자, 안춘경은 “재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너희들에게 체포된 것은 종생의 유감이다.”라고 말하였다. 1910년 5월 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2년 9월 13일 소위 은사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어 1913년 5월 경 출옥하였다. 출옥 한 후에도 그는 박은조(朴銀兆), 배관옥(裵寬玉)과 함께 진위군 오성면 한경서(韓景瑞)의 집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14년 경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받았다.
※ 경성복심법원에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그 결과는 미상이다.
관련자료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157쪽.
「폭도체포의 건 속보(수원서장 보고요령)」(1909.9, 경기도), 「경기도경찰부장경무국장」(1909.12.경기도), 「경기도경찰부장, 좌기」,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 238, 248쪽.
『매일신보』 1914.9.17. 3면, <은사감등된 강도>.
김상기, 「한말 정주원의병의 항일투쟁」, 『충청문화연구』 창간호, 2008, 1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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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수 |
安忠洙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현 평택시 비전동)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에서 150명의 군중들이 참여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장날인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 사거리에 모인 150명의 사람들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군문리 다리로 행진하고, 소방대에 들려 종을 쳐서 만세운동을 독려하다 경찰의 출동으로 해산당하였다. 12명의 인사와 함께 검거된 그는 19일까지 심문을 받고 학교 교장의 담보로 풀려났다.
그 후 1930년 진위·안성의 무산대중과 함께 ‘진안협동조합’을 창립하였고, 1930년대 『동아일보』 평택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관련자료
金正明 편, 高제6763호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13報)」(1919.03.12.) , 『朝鮮獨立
運動 Ⅰ』, 1967년, 352쪽
『매일신보』 1919.03.25. 3면, <騷擾事件의 後報>.
『동아일보』 1930.10.21.
『동아일보』 1931.04.09.
『동아일보』 1933.09.04.
『동아일보』 1936.04.26.
『조선일보』 193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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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문 |
安喜文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 482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 |
이명 |
安光日 |
형량 |
징역 6개월 |
생몰년도 |
1898.04.21. ~ 1979.01.31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현 평택시 오성면 안화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안육만(安六萬)과 김원근(金元根)이 청북면 백봉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자 이에 같이 참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일은 경기도 진위군의 평택(平澤)에서 3,0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와 더불어 부용면(芙蓉面), 고덕면(古德面), 북면(北面) 등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안화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안희문은 4월 1일 안육만과 김원근이 함께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도로에서 큰소리로 “이 마을에서는 어찌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빨리 나와 부르자.”고 하여 사람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최만화(崔晩華), 황순태(黃順泰), 정수만(鄭水萬), 홍기성(洪奇成) 등과 함께 주민 수십 명과 마을에서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안희문은 1919년 5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공소와 상고를 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안희문)」
「안희문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경성복심법원: 1919.07.05., 고등법원: 19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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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익홍 |
嚴翼鴻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서정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94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신간회 수원지회) |
포상훈격 |
- |
진위군 송탄면 서정리(현 평택시 서정동) 사람이다. 1925년 동아일보 수원지국 오산분국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8년 신간회 12월 신간회 수원지회의 재무부 간사에 선임되었고, 1929년 4월 7일 신간회 수원지회의 조직선전부 간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1929년 11월 신간회 수원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임시집행부의 서기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9년 11월 9일 박승극이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수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 2월 20일 경부선 서정리역 전에서 운수조합을 운영하던 중 대구노동자협의회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으나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방면되었다.
관련자료
『중외일보』 1929.11.15. 4면, <수원청맹 집행위원회>.
『동아일보』 1925. 3.30. 1면, <본사원지국 오산분국 설치>.
『동아일보』 1933.02.22. 6면, <荷主組主人을 突然檢擧해 西井里驛前 마루대하주조 嚴翼鴻氏>.
『동아일보』 1933.04.15. 3면, <嚴翼鴻氏 放免 : 大邱基靑中心 勞動者協議會事件혐의로 취조 받고>.
『조선일보』 1928.12.23.; 192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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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환 |
吳成煥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중리(생지), 경성부 장사동 133번지/ 인천부 외리 216번지 |
이명 |
吳成完 |
형량 |
- |
생몰년도 |
1895.08.26. ~ 1964.07.15 |
계열 |
만주방면 |
포상훈격 |
애국장 |
진위군 오성면 안중리(현 평택시 안중읍 안중리)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4월 진주에서 백정들의 신분해방을 모토로 창립된 형평사(衡平社)의 충남지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장지필 등과 형평사 본부의 서울 이전, 형평운동의 사회·계급운동과의 연합을 주장하며 형평사혁신동맹을 결성하고, 1924년 4월 말 서울에서 형평사혁신동맹 총본부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1924년 8월 전조선형평사대회에서 형평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고, 1925년 4월 24일, 25일 서울의 전조선형평사대회에서 양 단체를 통합시켜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만주 길림에서 정의부, 천도교연합회, 형평사의 삼각동맹으로 결성된 고려혁명당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26년 12월 체포되어 1928년 4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으며, 동년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미결구류 200일 본형 산입)으로 감형되었다.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0년 4월 6일 만기출옥하였다. 그는 출옥한 지 한 달만인 5월 7일 충남 강경에 가서 형평사원의 활동을 성원하였다. 1932년 4월 형평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6년 2월 1일 “공산주의 사상을 부인하고 사상전향자를 보도 구원하고자 함”이란 취지로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를 창립하고 감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80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고려혁명당사건 관련자 판결문」(신의주지방법원: 1928.4.20., 평양복심법원: 1928.10.18.).
국가보훈처, 『쌍공 정이형 회고록』(국가보훈처, 1996).
「형평사대회에 관한 건」(1924.04.25.,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 2』.
「형평사 제2주년 창립기념 축하식의 건」(1925.04.26.,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 2』.
『중외일보』 1925.01.13., 2면, <형평사의 교육열>.
『동아일보』 1927.02.07., 3면, <고려혁명당은 예심에>.
『동아일보』 1930.04.08., 2면, <고려혁명당 오성환씨 출옥>.
『중외일보』 1930.05.16., 4면, <형평사 환영기를 경찰이 압수>.
『중앙일보』 1932.04.28., 2면, <형평사 전체대회 종료>.
『삼천리』 9-5, 1937.10., <시세와 제단체의 진용>.
『동아일보』 1956.11.17., 3면, <낙선후에 찦사고 오성환씨 생명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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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선 |
吳昌善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164 / |
이명 |
- |
형량 |
징역 5년 |
생몰년도 |
1884.01.12.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애국장 |
1895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현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사람이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구현, 이택화와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 2월 18일 안구현, 이택화 함께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 김태연(金台淵)의 집에 가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안구현과 이택화가 김태연에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문서를 보이고, 모형 권총을 꺼내어 위협하며 군자금 제공을 요청할 때 오창선은 망을 보았다. 그리하여 김태연 으로부터 100원을 모금하였다.
오창선은 이택화와 군자금 모금을 계속하여 1920년 3월 10일 진위군 포승면 내기리 이민화(李敏和)의 집에 가서 이택화가 이민화에게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문서를 보이며 1,000원을 내놓으라고 할 때 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3월 19일 안구현의 집에 가서 110원을 모금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그는 1920년 4월 28일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오창선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 1920.04.28.).
『독립유공자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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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창 |
元心昌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안정리 175 / |
이명 |
元勳 |
형량 |
- |
생몰년도 |
1906.12.01. ~ 1971.07.04 |
계열 |
중국방면 |
포상훈격 |
독립장 |
진위군 팽성면 안정리(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사람이다. 그는 1914년 9살이 되던 해 평택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8년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또한 평택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는 그가 평생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만세시위에 가담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는 노동자로 학비를 벌어 1925년 니혼대학 사회학부에 입학하였으나 학비 부담으로 한 학기 이상 다니지 못하고 결국 중퇴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학을 다니는 몇 개월 동안 무산학생학우회에 가담하였고,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여러 아나키즘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였고, 결국 아나키즘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그 단체가 바로 ‘흑우회’이다.
흑우회는 1923년 박열이 조직한 단체로 일본의 대표적인 한인무정부주의단체였다. 그러나 박열이 체포되면서 단체는 위기에 처해져있었는데, 원심창이 흑우회에 가입하면서 흑우회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일본인들로 조직된 흑색청년연맹과 한일연대를 모의하였고, 조직개편도 단행하였다. 또한 1926년 5월 기관지 ≪흑우(黑友)≫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흑우회는 1927년 흑풍회로 단체명을 변경하고 재일노동자들을 위한 일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다른 여러 아나키즘단체와 연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심창은 1929년 4월 동경유학생학우회(東京留學生學友會) 폭력사건으로 징역 3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더 이상 일본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30년 원심창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무대를 옮겼다. 그는 1931년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조선연맹을 조직하였고, 몇 달 뒤 흑색공포단도 조직하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유자명을 비롯한 여러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원심창과 일본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들도 많았다. 그는 이들과 함께 남화한인조선연맹과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일에 몰두하여 격문을 배포하거나 메이데이에 선전문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다.
원심창은 남화한인조선연맹에서 활동하는 동시에 대만, 일본, 미국, 중국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흑색공포단은 ‘현사회의 모든 권력을 부인하고 새로운 세계 전 인류가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할 수 있는 신사회 수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의 주요 활동은 일제의 기관파괴 및 요인 암살, 친일파 숙청, 배일선전이었다. 원심창은 흑색공포단의 행동대원으로 1932년 11월 천진 일본영사관 일군병사(日軍兵舍)를 폭파하는 것을 모의하였으며 실제로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파괴시켰다. 또한 1933년 3월 1일에는 항일선전문을 등사하여 상해의 동포들에게 배포하여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년 3월 흑색공포단의 동지들과 회합하여 유길명(有吉明) 주중(駐中) 일본 공사가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만주포기 및 열하지방(熱河地方) 대일부저항(對日不抵抗)을 책동하는 음모를 폭로·저지하는 대책을 모의하고 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 등과 유길명을 처단할 목적으로 대기하던 중 현장에서 3명 모두 체포되었다. 1933년 11월 24일 일본 장기재판소(長崎裁判所)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5년 10월 10일 석방되었다.
원심창은 해방 후에도 나라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초 일본으로 돌아가 재일한인사회의 안정을 위해 진력했다. 그는 신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이어감과 동시에 통일운동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또한 박열 등과 함께 재일한인사회의 보호와 권익옹호를 위해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설했다. 그는 초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였고, 1951년 4월에는 민단 중앙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그는 남북통일을 위해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이 단체에서 중앙대표위원과 사무국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단체를 이끌었다. 좌우합작, 협의기관 결성. 통일운동촉진 서명운동, 3·1운동 기념식 거행 등의 운동방침을 가진 이 단체는 재일한인들의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활동을 이어갔다. 남북통일촉진협의회에서 원심창은 『통일조선신문』을 창간하고 대표상임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계속해서 통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1973년 7월 4일 별세하였다. 1977년 정부 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원심창 판결문」 (장기지방재판소, 1933. 11. 24)
『고등경찰요사』, 163·164쪽.
『명치백년사총서』 2, 551·607쪽.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7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781-78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54·155·825·826·833·835·83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 448·452·458쪽.
『평택항일독립운동사』, 332-334쪽.
『통일조선신문』 1971.07.07
유자명, 『나의 회억』, 1983.
「在上海南華韓人靑年聯盟の綱領規約及宣言」, 『사상휘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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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승 |
元齊昇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도일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44 ~ 1935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송탄면 도일리(현 평택시 도일동)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에 참가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이후 일어난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3월 1일 정오부터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 33인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 쪽으로 달려 나와 시위행진을 하였다. 원제승은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서울 종로에서 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 1919년부터 1929년까지 진위군 송탄면장으로 활동하였다(『조선총독부직원록』).
관련자료
평택문화원,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2004, 301쪽.
『조선총독부직원록』 1919~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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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식 |
元俊植 |
본적/주소 |
경기도 평택시 송탄면 이충리 261 / 경기도 고양군 숭신면 청경리 경성농학교 기숙사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14.03.04.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공산주의, 조선적화공작사건 |
포상훈격 |
- |
평택시 송탄면 이충리(현 평택시 이충동) 사람이다. 1934년 경성농업학교 학생으로 수학하던 중 경성제국대학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가 정태식(鄭泰植)·이재유(李載裕)·권영태(權榮台)와 함께 추진하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남만희, 임택재, 정룡산, 박일형이 지도하는 반제동맹 소속의 경성농업학교그룹의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34년 1월 29일 조선공산당 활동을 제지하려던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곧 석방되었다.
관련자료
「城大敎授 三宅鹿之助를 중심으로 한 鮮內 赤化工作事件 檢擧에 관한 件」(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4.08.31.),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 발각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4.02.07.),
「원준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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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 |
柳萬壽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333 / |
이명 |
- |
형량 |
태 90 |
생몰년도 |
1895.06.08. ~ 1946.03.06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포상가능 |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진위군 북면 봉남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봉남리는 천도교인이 많은 곳이었는데 3월 31일 대규모 인원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봉남리 333번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유만수는 김봉희(金鳳熙), 최구홍(崔九弘), 박성백(朴成伯), 전영록(全榮祿), 유동환(柳東煥)과 함께 손병희 등이 제창한 조선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31일 오후 4시경부터 6시경까지 사전에 만들어 놓은 태극기 30매를 가지고 나와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관주재소 앞 등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매일신보』에 의하면 면장을 끌어갈 정도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자동차를 몰고 현장에 가서 진압을 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17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유만수는 이에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언도 받았으나, 이후 공소하여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 90을 받았다.
관련자료
「유만수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09., 경성복심법원: 1919.06.21.).
『매일신보』 1919.04.03. 3면, <면장을 끄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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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익 |
兪鎭益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 포승 신영 343 / 미국 디트로이트, 네브라스카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86 ~ 미상 |
계열 |
미주방면 |
포상훈격 |
- |
진위군 포승면 신영리(현 평택시 포승읍 신영리) 사람이다. 미주 네브라스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구한말 미국으로 건너가 1909년에서 1913년 무렵 미국 네브라스카의 중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1914년 2월 소년병학교유지단을 발기하여 박용만이 설립한 소년병학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한다. 1920년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지방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1921년 3월 3일 소위 친일파 유계상을 비판하는 문서를 신한민보사에 제출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 본적상의 유진익과 자료상의 유진익이 동일인인지 여부는 현재 확증되지 않는다.
관련자료
『신한민보』 1909.10.27., 2면, <미 네브라스카 및 부근지방 학생>.
『신한민보』 1913.10.17., 1면, <로스앤젤레스 링컨 유학생 일람표>.
『신한민보』 1917.10.04., 1면, <오르간 연조>.
『신한민보』 1920.03.12., 2면, <디트로이트 지방회 보고>.
『신한민보』 1920.06.29., 4면, <내지에서는 원수의 강박을 불고 민심은 더욱더욱 전진한다>.
『신한민보』 1921.03.17., 3면,<친일자 유계상 공박, 디트로이트 한인 일동의 발기>.
『국민보』 1914.02.21., <소년병학교 유지단 취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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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종 |
柳漢宗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333 / |
이명 |
柳東煥 |
형량 |
징역 1년 |
생몰년도 |
1897.01.28. ~ 1941.10.05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봉남리 3·1운동 주도자로 마을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봉남리는 천도교인이 많은 곳이었는데 3월 31일 대규모 인원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봉남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유한종은 김봉희(金鳳熙), 최구홍(崔九弘), 박성백(朴成伯), 전영록(全榮祿), 유만수(柳萬壽)와 함께 손병희 등이 제창한 조선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태극기 30장을 제작하고 사람을 모아 1919년 3월 31일 오후 4시부터 6시 경까지 봉남리에서 태극기를 배포한 후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관주재소 앞 등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매일신보』에 의하면 면장을 끌어갈 정도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자동차를 몰고 현장에 가서 진압을 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17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유한종은 이에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이후 공소하여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8월 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1994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기존 공적조서에는 생년월일이 1897년 1월 28일로 기재된 반면,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생년월일이 1896년 1월 20일로 기재되어 있다.
관련자료
「유한종 판결문」(경성지방법원 : 1919.05.09.).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유한종)」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유동환)」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유한종)」
「유동환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09. 경성복심법원: 1919.06.21. 고등법원: 1919.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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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교영 |
尹敎永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사리 762/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81-00-00~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서탄면 사리(현 평택시 서탄면 사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진위군 서탄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전 3시경 윤기선(尹箕善)은 서탄면 면서기 한성수(韓聖洙)에게 명령하여 각 구장 앞에 동일 오전 10시경을 기하여 각 주민을 인솔하여 서탄면 면사무소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만약 이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큰 병을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발송하였다. 이에 각 구장은 동일 정오경 서탄면 면사무소 앞 광장으로 주민 약 400명이 모아서 만세운동을 하였다. 윤교영은 당시 만세운동의 취지에 찬성하여 문서를 배부 받은 내용을 주민 약 100명에게 알려 정오경에 윤기선을 따라 서탄면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만세운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1919년 6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가 불충분하여 무죄로 석방되었다.
관련자료
윤교영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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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선 |
尹箕善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사리 710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66.01.07. ~ 1922.02.21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서탄면 사리(현 평택시 서탄면 사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진위군 서탄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적하였고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전 3시경 서탄면장 윤기선(尹箕善)은 서탄면 면서기 한성수(韓聖洙)에게 명령하여 각 구장 앞에 동일 오전 10시경을 기하여 각 주민을 인솔하여 서탄면 면사무소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만약 이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큰 병을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발송하였다. 이에 각 구장은 동일 정오경 서탄면 면사무소 앞 광장으로 주민 약 400명이 모였고, 윤기선은 주민들에게 “세계의 대세는 조선독립의 시기에 도달하여 함께 경복할 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만약 이번의 거사로 인하여 자신이 체포되는 일이 생기면 주민은 들고 일어나 처벌을 받겠다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며 큰소리로 선창하여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9년 6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방해에 대한 증거가 불충하다는 사유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관련자료
「윤기선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6.17.).
|
윤대선 |
尹大善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사리 768 / ″ |
이명 |
- |
형량 |
무죄 |
생몰년도 |
1865 ~ 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서탄면 사리(현 평택시 서탄면 사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진위군 서탄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전 3시경 윤기선(尹箕善)이 서탄면 면서기 한성수(韓聖洙)에게 명령하여 각 구장 앞에 동일 오전 10시경을 기하여 각 주민을 인솔하여 서탄면 면사무소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만약 이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큰 병을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발송하였다. 이에 각 구장은 동일 정오경 서탄면 면사무소 앞 광장으로 주민 약 400명이 모여서 만세운동을 하였다. 윤대선은 당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동일 오전 10시경 서탄면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주민들에게 “조선이 독립한 후에는 현재 왜놈의 소유인 토지는 환원하고 왜놈은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한 후, 함께 만세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9년 6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방해에 대한 증거 불충분하다는 사유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관련자료
「윤대선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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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보 |
尹尙普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본정리 / ″ |
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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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대한독립의군부) |
포상훈격 |
- |
진위군 팽성면 본정리(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사람이다. 그는 1912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임병찬(林炳瓚) 등이 조직한 보황주의적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에 자금을 전달 및 지원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2년 고종황제로부터 칙서를 받은 임병찬이 조직한 단체이다. 임병찬은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격문을 발표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 일제의 호남의병대토벌로 숨어 지내던 의병들에게 고종의 내밀한 원조에 의해 독립의군부가 결성된 취지를 전달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 조직을 확대하고 강화시켜 나갔다. 투쟁방법으로 의병의 무력투쟁을 포함하여 다양한 항일투쟁을 계획했다. 우선 총독부·각국공사·일본정부에 각각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일제 관헌들에게
한일병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국외에 한국인이 일본의 통치에 계속 항거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 국민 투서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거사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조직원이 일경에게 체포되어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윤상보는 1912년 12월에서 1월 사이 이일영을 설득하여 대한독립의군부에 가입시키는 등 조직의 확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는 1913년 3월 하순 같은 마을 출신 이일영, 강태건과 함께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 3백원을 모아 대한독립의 군부원 김재순에게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 1921년 한훈(한우석)과 함께 활동한 본적이 전북 익산군 팔봉면 덕기리 740번지인 尹相普와의 동일인 여부는 추가적인 조사를 요한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이일영>.
「김재순 등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3.8.13.)」.
『매일신보』 1913.08.13. 2면 <世稱 獨立義軍府事件>.
『매일신보』 1913.07.06.; 07.14.; 08.06.; 08.1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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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식 |
尹周植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현덕면 두매리 228 / 경기도 경성부 안국동 77 |
이명 |
- |
형량 |
징역 8월 |
생몰년도 |
1901.10.15. ~ 2000.04.24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진위군 현덕면 두매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종로에서 발생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일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이후 일어난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3월 1일 정오부터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 33인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종로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가두시위를 하였다. 당시 경성부 안국동 77번지에 거주하며 사립중동학교(私立中東學校)에 다니던 윤주식은 3월 1일 오후 4시경 경성부 종로에서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 후 경찰에 체포된 윤주식은 1919년 4월 25일 경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고,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 동년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2006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윤주식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4.25. 경성복심법원: 1919.05.24. 고등법원: 19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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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석 |
李建錫 |
본적/주소 |
본적 미상 / 경기도 진위군 일북면 동천동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계열 |
의병 |
포상훈격 |
- |
진위군 일북면 동천동(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사람이다. 그는 1907년 의병에게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07년 9월 이건석은 의병 16명에게 서양총 8정을 강탈당하는 방식으로 군사무기를 제공하였다.
※ 1897년 박영효, 유길준, 조희연의 처벌을 주장한 이건석(李建奭)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조선왕조실록』1897.08.12.).
관련자료
『대한매일신보』 1907.09.07., 2면, <진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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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춘 |
李慶春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 경기도 경성부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25.02.03. ~ 2011.12.26 |
계열 |
학생운동(흑백당)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사람이다. 1940년대 초 서울에서 흑백당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이경춘은 안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흑백당이 결성되기 전인 1939년부터 경성고보의 이현상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조국 광복을 위해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활동하였다. 그 후 목적완수를 위해 계획을 진행하였는데, 1941년에 경성광산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는 동년 가을 당시 봉래동(현재 만리동) 소재 주낙원(朱樂元)의 집에 모여 정식으로 흑백당을 결성하고, 선언문·강령·규약 등을 정하였다. 이때 그는 동결사의 중앙집행위원의 일을 맡았다. 이들은 실천행동방략으로써 친일파 처단 명부를 작성하는 한편 일인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당시 욱정(旭町)(현재 남산동 부근) 일대를 방화하여 일인을 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일제의 패망과 조국광복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리는 격문을 각처에 뿌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항일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학생 김창흠(金昌欽)이 귀향 도중 열차 안에서 우리말로 일제를 욕하다가 1943년 10월에 일경에 체포되었고, 이때 가택수색과정에서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됨으로써 동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국내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었으므로 당원들은 긴급모임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고, 일단 당원 김성근(金盛根)의 자형이 있는 만주의 신민(新民)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1943년 12월초부터 2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다. 그런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에 의해 동 당원들은 1944년 1월경 만주의 북경·심양(瀋陽)·신민(新民)·승덕(承德) 등지에서 체포되었다. 그도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보성전문학교 출신으로 되어 있으나,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002쪽에는 경성사범학교 출신으로 되어 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독립운동사자료집』 1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1003-1004쪽.
『독립운동사』 9(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792-793쪽.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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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무 |
李啓武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12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15 ~ 미상 |
계열 |
일본방면 |
포상훈격 |
-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평택동) 사람이다.
1937년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일본대학 고등사범학교 학생으로 중일전쟁의 발발 후 “길은 올바르지 않다. 전사자가 300명이 아니고 3,000명이다”라는 소위 조언비어를 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관련자료
「사회운동의 상황」(1937),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 3, 7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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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석 |
李敎錫 |
본적/주소 |
본적 미상 / 경기도 진위군 일북면 동천동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계열 |
의병 |
포상훈격 |
- |
진위군 일북면 동천동(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사람이다. 그는 1907년 의병에게 군 자금을 제공하였다.
1907년 9월 15일에 이교석은 화승총을 가진 14명의 의병에게 화승총 2정을 강탈당하는 방식으로 무기를 제공하였다.
관련자료
『대한매일신보』 1907.09.19., 2면, <십오일에 진위정거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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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선 |
李圭璇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282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95.06.21.~1955.08.21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오후 5시경 성호면 마산시장의 장날에 유진홍(兪鎭弘), 안동순(安東順)은 약 300여명의 군중 속으로 교대로 들어가 태극기를 흔들고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면사무소와 오산경찰관 주재소 부근을 다니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주재소 순사 대목희시(大木喜市)는 유진홍 등을 끌고 갔는데 군중들이 석방을 요구하여 석방되었고, 이어서 오후 7시 30분 면사무소와 우편소 및 일본인의 집앞에서 투석을 하며 만세운동를 전개하였다. 당시 이규선은 정규환(鄭奎煥), 이성구(李成九), 김경도(金敬道), 유진홍, 공칠보(孔七甫), 김용준(金用俊)등 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고 투석을 하였으며, 우편소에 들어가 군대가 올 것을 염려하여 전화기를 파괴하고 부근의 일본인의 집에 투석을 하였다. 이에 보안법 위반, 소요, 기물 훼손 등으로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8개월을 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9월 18일 석방되었다. 2006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이규선)」.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이규선)」.
「이규선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경성복심법원: 19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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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창 |
李奎昌 |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51 / |
이명 |
- |
형량 |
징역 1년 3월 |
생몰년도 |
1900.02.17. ~ 1970.06.20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더 많은 마을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이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날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이규창은 1919년 4월 1일 원곡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이규창은 더 많은 마을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오후 8시경 원곡면민 약 1000명은 외가천리 소재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외치고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향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제등(提燈) 혹은 횃불을 붙여 만세를 연호하였고, 양성면 주재소와 우편소 및 면사무소에 몰려가서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다. 이에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혐의로 징역 1년 3개월 받았다. 1977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국사편찬위원회, 「신문조서(이규창)」,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23·24권, 1986.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이규창)」
「이규창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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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석 |
李基錫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대사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00 ~ (1919.03.14.)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팽성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4월 평택의 독립만세운동 당시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 『3·1운동피살자명부』(1953)에 의하면 1919년 3월 14일 대사리에서 타살되었다고 하나 기억의 착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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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학 |
李起鶴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덕좌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94.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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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군 청북면 덕좌리(현 평택시 안중읍 덕우리) 사람이다. 1921년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신기리에 거주하는 황로태(黃魯泰, 51), 포승면 희곡리 530번지에 거주하는 이민중(李敏仲, 19), 병남면 합정리 156번지에 거주하는 156번지의 이종국(李鐘國, 32), 입덕면의 황준재(黃俊在, 33), 경성 황금정의 황인재(黃仁在, 23)는 1921년 경 경성 수송동에 거주하는 임운승(林雲乘, 57) 등과 함께 총 13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단장은 황로태, 부단장은 이종국이었다. 이기학은 경성 수송동에 동거하고 있는 이민중, 이종국으로 하여금 등사판에 임시정부 특파원의 명의로써 독립문서를 만들어서 4월 14, 15일 경에 우편으로 평택에 보내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편검열로 곧 발각되었고, 평택경찰서에 13명이 체포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관련자료
『매일신보』 1921.05.02. 3면, <不穩文書를 郵送한 조선독립단장 외 11명을 평택에서 잡아 검사국>.
『독립신문』 1921.05.14. 2면, <피착사건일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