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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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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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덕순 李德順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지제리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79.04.15. ~ 1966.12.30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진위군 병남면 지제리(현 평택시 지제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 3·1운동에 참여하여 만세시위자들에게 양성으로 이동하여 만세를 부르자고 주도하였으며, 모두 돌을 챙겨 시위에 가담하자고 주도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이덕순,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이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날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덕순은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 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면, 양성면 내의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라. 또한 일본인을 양성면 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으므로 일본인을 양성으로부터 구축하라.” 등의 연설을 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자들이 체포, 연행되자 이덕순은 용인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추적이 계속되자,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병직(李炳稷)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1977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422∼482쪽.

『평택항일독립운동사』, 2004, 295쪽.

『안성의 독립운동가』, 2017, 217쪽.

사진 이도상 李道相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 551 / ″
이명 - 형량 징역 1년
생몰년도 1890.09.26.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현 평택시 비전동) 사람이다. 미곡상으로 생활하던 그는 1919년 3월 5일경 『매일신보』에 서울 및 조선 각지에서 조선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전해 듣고서 자신도 평택 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목준상(睦俊相), 심헌섭(沈憲燮), 한영수(韓泳洙) 등과 평택 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10일 밤 동생인 이덕상(李德相)에게 “이 기회에 조선독립을 꾀하기 위하여 명일이 평택 장날이므로 이곳에 가서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을 제창하여 만세를 외칠 작정이다. 그렇게 하면 체포될 것이므로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3월 11일 평택 읍내의 평택역 앞과 평택시장 등지에서 목준상, 심헌섭, 한영수 등과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학생 등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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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도상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4.11. 경성복심법원: 1919.05.05. 고등법원: 1919.05.31.)

사진 이두종 李斗鍾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신대리 384 / ″
이명 李炯鍾, 李浪雲, 李浪炯, 李雲鍾 형량 징역 10월
생몰년도 1916.07.27. ~ 1997.09.25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진위군 병남면 신대리(현 평택시 신대동) 사람이다. 1930년대 평택독서회 활동을 하였다.
이두종은 1933년 6월 경 자신의 마을에서 신태호, 이영선, 한철수, 민태옥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과 공산화를 목적으로 하는 ‘단목회(檀木會)’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매월 15일 동지를 회합하여 사회주의 서적을 교재로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다. 1935년 11월 단목회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신태호와 협의하여 같은 마을의 이병선, 김상열, 유경식, 송종식, 이명재, 조돈세, 박윤길, 김진립 등과 단목회와 동일 목적을 가진 평택독서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이두종은 회원들과 「메이데이의 의의」, 「자본주의의 기구」, 「변증법적 유물론」 외 수종의 사회주의 서적을 교재로 독서회를 개최하고 의식을 고양하였다.
이두종은 1938년 3월 중순 같은 마을 박룡주의 집에서 마을 사람인 김용덕, 우상옥, 박원길, 정상득, 용영기 등에게 “금회의 사변에서 장개석은 소련, 영·미 등 각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항일전을 계속함으로써 조속히 해결될 것이다. 결국 세계대전으로 진전할 수밖에 없다. 최근 소련의 비행기는 용감하게 도쿄와 오사카를 폭격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출현하였다.”라는 취지의 이른 바 ‘조언비어’를 하였다. 이일로 일경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의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7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9년 7월 수원군 수원읍 매향정 64번지 김계근(金桂根)의 집 온돌방 1칸을 빌려 설립사무소로 하고 향인좌(鄕人座)라는 극단을 결성하고 단원을 모집하고 활동하였으나 자금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수원읍 남수정 875번지 이원학(李元學)에게 자본주의 경제조직의 모순과 결함을 지적하고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위해 자신과 협력해줄 것과 자금줄을 물색하여 알선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 직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1년 2월 9일 출옥하였다. 2009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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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이두종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40.08.09.)

「치안유지법 및 육해형법위반사건 검거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8.07.22.).

「극단을 가장한 불온계획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9.11.21.)

「이두종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사진 이명천 李明天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에 참가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이후 일어난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3월 1일 정오부터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 33인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탑동공원에 모여 있던 수 많은 군중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 쪽으로 달려나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명천은 당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윤기·전용록·변경남·김복희·유동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 다만, 이로 인해 체포되거나 수형을 받지 않았다.
관련자료

평택문화원,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2004, 301쪽.

사진 이민백 李敏白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진위군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19년 음력 2월 중 경기도 진위군 북면(北面) 가곡리(佳谷里)의 권익수(權益洙)가 자신의 집에 찾아와 경성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수원군과 진위군에서만 만세를 부르고 있지 않다고 하며 그 확산을 부탁하자 비밀리에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진위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데 기여하였다.

※ 다만, 이로 인해 체포되거나 수형을 받지 않았다.
관련자료

「권익수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09.22.)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2(3·1운동), 1969.

사진 이민중 李敏仲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 530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2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사람이다. 1921년 황로태 등이 조직한 조선독립단에 관계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신기리에 거주하는 황로태(黃魯泰, 51), 병남면 합정리 156번지에 거주하는 156번지의 이종국(李鐘國, 32), 입덕면의 황준재(黃俊在, 33), 경성 황금정의 황인재(黃仁在, 23)는 1921년 경 경성 수송동에 거주하는 임운승(林雲乘, 57) 등과 함께 총 13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단장은 황로태, 부단장은 이종국이었다.
이민중은 경성 수송동에 동거하고 있는 조선독립단 부단장 이종국과 함께 등사판에 임시정부 특파원의 명의로써 독립문서를 만들어서 1921년 4월 14, 15일 경에 평택에 우편을 보내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편 검열로 곧 발각되었고 다른 단원과 함께 평택경찰서에 체포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 기소와 수형 여부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관련자료

『매일신보』 1921.05.02. 3면, <不穩文書를 郵送한 조선독립단장 외 11명을 평택에서 잡아 검사국>.

『독립신문』 1921.5.14., 2면, <피착사건일속>.

사진 이병헌 李炳憲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현덕면 권관리 455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6.11.20.~1976.01.27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진위군 현덕면 권관리(현 평택시 현관면 권관리) 사람이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이민도는 진위와 수원 등지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고, 동학농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 또한 1919년 진위군 현덕면 3·1운동을 준비하다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이병헌 또한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도교 교리강습소에서 수학하여 근대적 학문과 종교적 소양을 쌓았다. 1912년 17세가 되던 해 천도교 중앙총부 종학강습소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수원지역에 천도교 청년회 수원지회를 조직하고, 이곳에서 순회강연과 특별대강연회, 각종 강습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병헌은 1919년 3·1운동의 준비와 전개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는 손병희의 부탁으로 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의 독립운동 3대 원칙을 기록하여 동지들에게 전달하였고 동년 2월 중에 천도교 교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5,000원(圓)을 인출, 이승훈(李昇薰)에게 전달하여 기독교계의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1919년 2월 27일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돕고 이를 비밀리에 천도교당으로 운반한 후 다시 전국 각지에 배부케 하였으며,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당시 진행상황을 기록하는 한편 탑골공원에 운집한 학생 및 시민들과의 연락을 맡아 활동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이 피체 된 이후에는 3월 1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그를 검거하기 위해 검거령을 내렸다. 그는 일제 관헌을 피해 수원으로 피신하였으며 이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한 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제암리학살사건을 목격하였고, 이를 기록하였다.
이후 천도교에서 주도세력으로 활동하면서 천도교 청년동맹 경성부, 경기도연맹의 대표를 맡아 청년운동을 주도하였고, 1927년 좌우합작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신간회 경성지회의 간사로 선출되었고, 신간회 본부에서 전국 순회강연, 민중대회를 이끌었다.
1959년 『3·1독립 운동 비사』를 집필했다. 199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성주현, 「오암 이병헌의 생애와 민족운동」, 『일제하 민족운동 시선의 확대-3·1운동과 항일독립 운동가의 삶-』.

사진 이봉순 李鳳舜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대반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8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 대반리(현 평택시 안중읍 대반리) 사람이다. 그는 경성에서 조선독립만세에 대한 선전문을 만들어 이를 배포하였다.
그는 경성의 기독교학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2학년생으로, 장용하(張龍河)와 함께 3월 7일 경성 관훈동에 거주하는 변호사 이기찬(李基燦)의 집에서 탄산지(炭酸纸)를 이용하여 조선의 독립은 확실하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수 십장 제조하여 안국동 방면에 배포하였다. 이후 3월 15일 이봉순은 이전과 같은 원고에 기초하여 이춘봉(李春鳳), 장용하와 함께 이기찬 소유의 등사판을 사용하여 약 30장을 인쇄하여 안국동 방면에 계속 배포하였다. 이에 일본은 4월 18일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警告文」이란 제목의 ‘소요선동’ 인쇄물을 발견하고 경성에 소재하고 있는 기독교학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 생도 장용하를 혐의자로 체포하여 취조하는 도중 함께 협력한 사람들을 발견하였고, 이봉순도 이에 보안법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5월 1일 경성지방법원으로 사건이 송치되어 조사를 받았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騷密1779號 「極秘 不穩文書印刷配布者檢擧の件」(1919.05.08.)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697~698쪽.

사진 이사필 李思弼
본적/주소 경기도 시흥군 봉천면(생지)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482(본적, 주소)
이명 - 형량 징역 1년 6월
생몰년도 1888.12.05. ~ 1925.04.22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사람이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의하면 그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봉천(鳳天)에서 1888년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발생한 오성면 학현리 3·1운동의 주도자이다.
1919년 4월 초에는 경기도 안성군, 수원군, 진위군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진위군 내의 각 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진위군 오성면의 학현리에 서도 4월 3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학현리 482번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사필은 김용성(金容成), 공재록(孔在祿)과 인근의 봉오산(鳳梧山) 위에서 주민 12~13명과 봉화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용성은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공소 및 상고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소위 은사로 1920년 4월 28일 석방되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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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金正明 편, 「4月3日における各地の狀況報告の件」(1919.04.04.) 朝鮮軍司令官→陸軍大臣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94쪽.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이사필)」.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이사필)」, 『독립유공자공훈록』.

「이사필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20., 경성복심법원: 1919.06.30., 고등법원: 1919.08.21.).

사진 이상룡 李相龍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현덕면 덕목리 118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미상 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현덕면 덕목리(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사람이다. 1927년 경신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29년에서 1930년 1월 사이, 광주지역에서는 일본학생이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라는 말을 하며 무시한 것을 계기로 광주고보학생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가두시위를 진행하였다. 이상룡은 경신고보 4학년생이던 1930년 이 소식을 듣고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운동으로 인하여 퇴학 처분을 받았다.
관련자료

「경기도학생동요사건 퇴정학생도의 처분표에 관한 건」(1930.6.9.), 『사상에 관한 정보철』 6책.

사진 이상신 李相信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86 (현 평택시 죽백동) /
이명 李興道 형량 징역 7년
생몰년도 1888.05.05. ~ 1961.04.19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국장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제의 면사무소에 방화하는 등 강력히 투쟁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오후 9시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리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이상신은 1919년 4월 1일 원곡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오후 8시경 원곡면민 약 1000명과 외가천리 소재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외치고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향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제등(提燈) 혹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주재소와 우편소 및 면사무소에 몰려가서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다. 이상신은 양성주재소에 돌을 던져 파괴하고 우편소를 습격하였으며 원곡면사무소 오른쪽의 숙직실로 쓰이는 초가집의 지붕에 불을 놓아 소훼하였다. 이에 이른 바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죄로 징역 7년을 받았다.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이상신)」

「이상신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사진 이순언 李順彦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방림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0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포승면 방림리(현 평택시 포승읍 방림리) 사람이다. 태두섭이 이끄는 청림교단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태두섭(太斗燮)이 이끄는 정감록을 믿는 신종교적 비밀결사 청림교(靑林敎)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관련자료

「靑林敎徒들의 保安法違反 其他 檢擧에 관한 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3.01.28.).

「靑林敎徒 등의 保安法違反 其他 檢擧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2.12.18.).

사진 이승익 李承益
본적/주소 경기도 평택 송탄면 모곡리 139(생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180
이명 李公三 형량 징역 2년
생몰년도 1886.10.03. ~ 1942.04.17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진위군 송탄면 모곡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의 3·1 운동에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고 일제의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이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날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이승익은 1919년 34세가 되던 해 원곡면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했다. 원곡면의 3.1만세운동에서 최은식 등 주도자들의 연설을 듣고 동조했으며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승익은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양성면으로 이동하였고 당시 중요한 통신시설인 우편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이승익은 경성 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죄로 1921년 1월 22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80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李承益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3;三一運動 XIII, 1995.

「이승익 판결문」 (고등법원: 1920.03.22. 경성복심법원: 1921.01.22.)

『동아일보』 1920.07.23, 3면, <今日公判開廷되는 安城事件豫審决定書>

『매일신보』 1919.08.10 3면, <安城의 崔殷植等 百二十六名豫審終決決定>

『조선일보』 1920.12.22. 3면, <안성군 독립단의 공판.금일 경성복심법원특별법정에서 총원재판장 입회하에 제1심에서 공소불수리의 판결되였던 崔殷植이하 2백26명의 공판을 개정>

사진 이약우 李若雨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송북동 건지마을) /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3.01.11 ~ 1978 계열 문화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송탄면 건지마을(현 평택시 송북동) 사람이다. 보통학교 학생으로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선배 이병헌의 영향을 받아 고덕면의 고문재, 병남면의 민응환 등과 함께 평택지역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안성군과의 제휴를 도모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부용면 에서 군중과 함께 떼를 지어 평택 구읍 뒷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시위를 하였다. 이후 평택역으로 전진하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고 한다.
농촌계몽에 뜻을 두었던 이약우는 진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보통농림학교로 진학하여 수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양묘업에 종사하며 헐벗은 국토를 가꾸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관련자료

李炳憲, 『三·一運動秘史』, 時事時報社, 1959, 880~881쪽.

평택문화원,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2004, 299~300쪽.

사진 이양섭 李陽燮
본적/주소 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64 /
이명 春光 형량 징역 10년
생몰년도 1894.02.28. ~ 1925.05.19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독립장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 3·1운동의 주모자로 마을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이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날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지역의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이양섭은 39세가 되던 해인 1919년 4월 1일 원곡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에 가담했다. 이양섭은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 운동에 참여할 것을 선동하였으며 양성면에 위치한 일제의 주재소, 마을사무소, 우편소를 방화하였다. 안성사건의 주모자로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죄가 적용되어 징역 10년의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복역 중에도 서로 밀통 옥중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관헌 간수의 구타로 옥중에서 7시간 실신 후 1925년 5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1968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공훈록에는 1894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문조서 판결문등을 통해 볼 때 1881년 12월 20일 생으로 추정됨.
관련자료

「이양섭 판결문」 (고등법원: 1920.03.22. 경성복심법원: 1921.01.22.)

「이양섭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3;三一運動 XIII, 1995. 『삼일운동비사』 879쪽.

『동아일보』 1920.07.23., 3면, <今日公判開廷되는 安城事件豫審决定書>

『매일신보』 1919.08.10, 3면, <安城의 崔殷植等 百二十六名豫審終決決定>

『조선일보』 1920.12.22. 3면, <안성군 독립단의 공판.금일 경성복심법원특별법정에서 총원재판장 입회하에 제1심에서 공소불수리의 판결되었던 崔殷植이하 2백26명의 공판을 개정>.

사진 이영서 李暎瑞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73 ~ (1925.03.05.)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사람이다. 1919년 3~4월 경 포승면 희곡리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독립만세 시위 중 총을 맞았고, 1925년 3월 5일 사망하였다고 한다.

※ 『3·1운동 시 피살자명부』에 따르면 1925년 3월 5일 희곡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사진 이영우 李英雨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86 (현 평택시 죽백동) /
이명 建和 형량 징역 1년 3월
생몰년도 1901.12.21. ~ 1979.07.02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에서 발생한 3.1운동에 참여했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이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날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이영우는 1919년 4월 1일 원곡면 3.1운동에 참여했다. 원곡면의 3.1만세운동에서 최은식 등 주도자들의 연설을 듣고 동조했으며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영우는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로 징역 1년 3월에 처해졌다. 1979년 7월 2일 사망했다. 198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이영우 판결문」 (고등법원: 1920.03.22. 경성복심법원: 1921.01.22.)

「이영우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3;三一運動 XIII, 1995.

『동아일보』 1920. 07.23, 3면, <今日公判開廷되는 安城事件豫審决定書>

『매일신보』 1919. 08.10 3면, <安城의 崔殷植等 百二十六名豫審終決決定>

『조선일보』 1920.12.22. 3면, <안성군 독립단의 공판.금일 경성복심법원특별법정에서 총원재판

장 입회하에 제1심에서 공소불수리의 판결되였던 崔殷植이하 2백26명의 공판을 개정>.

사진 이용희 李龍希
본적/주소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상신리 5통 9호 711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693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8.11.08. ~ 1987.04.13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수원군 향남면 상신리 출신으로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현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에 거주하였다. 이용희는 소년기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제암리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일제에 의한 제암리학살사건을 목격하고 항일독립의지를 키워나갔다. 이후 17세에 결혼을 하였고, 1926년 18세 되던 해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693번지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던 중 장인 한직수의 친척인 한영수로부터 아들 한상우와 함께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요원에게 전달하여 줄 것을 부탁받았다. 한영수의 논을 매각한 대금 600원을 각기 반씩 휴대하고 인천으로 가 수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요원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일제가 대륙침략전쟁을 일으키고 한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황민화정책과 더불어 창씨개명을 추진할 때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여 일제에 대항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끌려가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관련자료

『평택항일독립운동사』, 340쪽.

사진 이익종 李翼鍾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 율포리 25 / 경기도 경성부 종로 훈정 78 (경성부 체부동(體府洞))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8.04.20. ~ 1950.10.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건국포장
진위군 고덕면 율포리(현 평택시 고덕면 율포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일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서울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익종은 서울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1919년 고종의 인산일 전날인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식을 참여한 후 다른 학생 동지와 함께 열광적인 활동을 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창덕궁-종로통의 시위 지역을 뛰어 다니며 학생들에게 왕래하는 대중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자고 선동하였다. 또한 종로 4정목 파출소 앞에 모인 군중 앞에서는 독립의 정당성을 기세 높게 연설하였으며, 종로통, 남대문, 대한문전, 의주통, 기타 지역의 시위와 독립 만세 고창을 선도하여 전위적으로 항쟁 지도를 담당하였다. 이에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헌병 경찰 외에 조선주둔군 중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출동시켜 시위군중을 해산하려 하였고 철도원호대·소방대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또 이익종은 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순사에게 잡혀 있는 다른 만세시위자를 파출소에서 탈출시키기도 하였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그는 출옥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는데, 그는 고향인 진위군에서 진위청년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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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이익종판결문」(경성지방법원:1919.08.30.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경성복심법원: 1920.02.27.)

이익종 신문조서(1919.3.21./3.27/5.2),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3;三一運動 XIII, 1995.

『매일신보』 1919.11.08. 3면, 「前無後無한 大判決,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은 모조리 학생」

『동아일보』 1926.10.23. 4면, 「振威靑年演劇」.

사진 이인수 李仁洙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함정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81 ~ (1919.05.27.)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팽성면 함정리(현 평택시 팽성읍 함정리) 사람이다. 1919년 3~4월 평택의 독립만세운동 당시 매를 맞고 5월 27일 죽었다고 한다.

※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에 의하면 1919년 5월 27일 함정리에서 타살된 것으로 되어있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사진 이일영 李一榮
본적/주소 충청남도 진위군 팽성면 본정리 1통 9호 (39번지) / 경기도 경성부 북부 농국동 78-7 金充基方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65.12.11. ~ 1925.01.15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건국포장
양반 유생 출신으로 진위군 팽성면 본정리(현 팽성읍 본정리) 사람이다. 그는 임병찬·김재균·곽한일 등이 1912년에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12년 12월에서 1913년 1월 사이에 윤상보(尹尙普), 전용규(田鎔圭) 등으로부터 대한독립의군부 가입을 권유받고 2월에 가입하였다. 그는 2월 전용규와 함께 대독립의군부의 정헌(正憲)을 제정하였으며, 회계총감을 맡아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다. 1913년 3월 하순 같은 마을 출신 윤상보, 강태건과 함께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 3백원을 모아 대한독립의군부원 김재순에게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오정환과 오한근이 기탁한 각 100원을 대한독립의군부의 주도인물이던 곽한일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1919년 5월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동단(大同團)에 윤용주·정창수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그는 전북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에 거주하는 임응철(林應喆)을 대동단에 가입시키고 그를 대동단 전라북도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대동단은 1919년 11월 9일 의친왕 이강(李堈)을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모셔와 11일 밤 북행 열차를 태워 안동(安東, 현 丹東)으로 탈출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1월 28일 오후 4시 반경 안국동 경찰관 파출소 앞 광장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사건에 관여되어 체포된 이일영은 출판법 위반과 안녕질서의 방해죄로 검거되었다가 192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처분을 받아 방면되기까지 약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2014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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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이일영 신문조서 및 의견서」(1919.11.19.; 11.28.; 12.09),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1988.

『매일신보』 1913.07.06.; 07.14.; 08.06.; 08.14.

『동아일보』 1920.06.29. 3면, <대동단사건 예심결정서(一)>.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9, 478~479, 524~525쪽.

사진 이장헌 李長憲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198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17.10.08. ~ 미상 계열 일본방면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사람이다. 1938년 11월 경 일본 동경(東京)에서 정인철(鄭寅澈), 방우범(方禹範), 신승인(辛承寅), 차용제(車鎔濟), 손정엽(孫鼎燁), 고시복(高始福)과 마르크스주의연구그룹을 결성하고 1938년 11월경부터 1940년 3월 초순까지 사회주의서적을 읽고 연구·토론을 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경으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관련자료

「조선인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연구회원 검거 송국에 관한 건」(1941.5.4.),

『사상에 관한 정보』.

『특고월보』, 「社會運動의狀況(昭和16)」

사진 이전용 李田鎔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 308 / 경기도 경성부 창신동 330-6
이명 國本周鎔 형량 징역 6개월
생몰년도 1898.01.28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현 평택시 지산동) 사람이다. 경성부 창신동에 거주하며 포목행상으로 생활하던 중 체제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국가총동원체제를 형성하였다. 이전용은 이에 대한 저항 활동을 하였다가 1941년 5월 14일 경 체포되어 1941년 7월 28일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 60일 통산)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1월 29일 출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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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이전용)」.

사진 이조헌 李祖憲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내기리 49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0.07.12.~미상 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
진위군 포승면 내기리(현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 사람이다. 국권을 잃은 뒤 중국 북경으로 가서 1920년대 중반 북경대학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면서 창조파인 원세훈 등과 교류하며 활동하였다. 그는 1924년 북경 한교동지회의 조직, 1925년 『도보(導報:앞잡이)』의 발간, 1926년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의 조직하고 원세훈에게 250엔을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 귀국하여 1927년 진위구락부를 조직하고 이강헌, 이민복, 이민행, 서상학 등과 함께 30원 등의 자금을 출연하여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이시영과 조소앙 등에게 전달하였다. 또 그는 인천에서 과자점을 운영하며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안재홍 등과 교류하며 신간회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그는 『중어대전(中語大全)』, 『학해(學海)』 등의 많은 책자를 발간하고 유고를 남겼다. 1934년 병으로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관련자료

평택군지편찬위원회, 『평택군지』, 1984.

원세훈, 「상해·남경·북평간, 장거여행에 길동무하자든 고우」,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6.1. 320-321쪽.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에 관한 건」,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부-재지나각지』.

조규태, 「1920년대 북경지역 한인유학생의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0, 2008.

사진 이종국 李鐘國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합정리 156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0 ~ 미상 계열 국내항일(조선독립단)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합정리(현 평택시 합정동) 사람이다. 1921년 조선독립단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가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진위 포승면 신기리에 사는 황로태(黃魯泰, 51), 포승면 희곡리 530번지에 거주하는 이민중(李敏仲, 19), 청북면 덕좌리의 이기학(李起鶴, 27), 입덕면의 황준재(黃俊在, 33), 경성 황금정의 황인재(黃仁在, 23)는 1921년 경 경성 수송동에 거주하는 임운승(林雲乘,57) 등과 함께 총 13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단장은 황로태, 부단장은 이종국이었다.
이종국은 경성 수송동에 동거하고 있는 이민중과 함께 등사판에 임시정부 특파원의 명의로써 독립문서를 만들어서 4월 14, 15일 경에 우편으로 평택에 보내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편검열로 곧 발각되었고 평택경찰서에 11명과 함께 체포되어 1921년 4월 29일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관련자료

『매일신보』 1921.05.02. 3면, <不穩文書를 郵送한 조선독립단장 외 11명을 평택에서 잡아 검사국>.

『독립신문』 1921.05.14. 2면, <피착사건일속>.

사진 이종국 李鐘國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황구지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3 ~ 미상 계열 국내항일(수진농조)
포상훈격 -
진위군 서탄면 황구지리(현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 사람이다. 1903년 태어났다. 1931년대 초 수진농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수진농민조합은 1930년 3월 10일 진위군 북면 야막리 박규희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수원과 진위의 2개 군에 걸쳐 창립된 수진농민조합은 수원과 진위가 황구지천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어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경제적으로나 생활권의 차원에서 보면 동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2개 군에 걸쳐 조직될 수 있었다. 수진농조는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1931년 2월 집행위원회를 열었으며, 강우형을 의장에 선출한 후 박승극, 남상환, 김영상, 박두희 등을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조직을 재정비한 수진농조는 소작쟁의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수진농조의 활동에 일제는 수진농조의 활동을 탄압하고 감시를 삼엄히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영상은 남상환과 함께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심인택을 찾아가 농민운동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수진농조는 적색농민조합으로 성격을 바꾸게 된다. 수진농조를 적색농민조합으로 바꾸기 위해 김영상은 조직원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조직을 정비한 후 농조의 확대, 강화를 위한 활동에 들어가 지부조직을 위해 소작쟁의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수진농조는 투쟁을 통한 조직방침을 세웠다. 이들은 투쟁을 통해 민중의 정치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농조의 확대, 강화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이러한 조직방침 아래 수진농조는 1931년 10월 용소리와 황구지리에서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특히 김영상은 황구지리에서 일으킨 소작쟁의를 정치투쟁으로 이끌기 위해 투쟁방침을 협의하기도 하였으나 황구지리 소작쟁의를 계기로 일제에 조직이 노출되게 되면서 그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이종국은 1931년 수진농조에 참여하여 수원·평택 지역에서 소작쟁의를 주도한 혐의로 수원경찰서에 의해 검거되어 조사를 받고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관련자료

『매일신보』 1921.05.02. 3면, <不穩文書를 郵送한 조선독립단장 외 11명을 평택에서 잡아 검사국>.

『동아일보』 1930년 3. 13. 3면 7단, <진위농조창립>.

『중앙일보』, 1932.01.16 2면, <수원농민조합사건 박승극등 5명 기소>.

『매일신보』, 1932.09.07 7면. <농민적화계획코자 비밀결사를 조직, 송국이래구개월만에 징촌예 심판사가 출장조사」.

사진 이종만 李鐘萬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 (현 평택시 월곡동) /
이명 文明 형량 징역 3년
생몰년도 1873.09.26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국장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현 평택시 월곡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원곡 3·1운동에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으며 양성우편소에 돌을 던지고 그 안에 있는 서류들을 불태우는 등 강력하게 일제에 항거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이종만은 이건수의 권유에 따라 마을의 이윤오, 조정갑, 박정식과 같이 군중을 뒤따라 양성 읍내까지 가서 어떤 주막 앞에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양성우편소로 가서 돌을 던져 판자 벽을 부수고 또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을사람들이 원곡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있자 그곳에 가담하였다. 이 일로 이종만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201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이종만 검사 신문조서」 (1919.05.10.),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3;三一運動 XIII, 1995.

「이종만 판결문」 (고등법원: 1920.03.22. 경성지방법원: 1920.08.10. 경성복심법원: 1921.01.22.)

『동아일보』 1920.07.23. 3면, <今日公判開廷되는 安城事件豫審决定書>

『매일신보』 1919.08.10. 3면, <安城의 崔殷植等 百二十六名豫審終決決定>.

사진 이종필 李鍾弼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 138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94-7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14.09.23 ~ 미상 계열 국내항일(평택노농협의회)
포상훈격 애국장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현 평택시 지산동) 사람이다. 1930년 평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4월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2년 5월 이억근(李億根), 우종식(禹鍾植) 등과 비밀리에 공청학생회를 조직하여 팜플렛트를 제작·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좌익서적 소지 문제로 퇴학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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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향인 평택에 돌아와 이희수, 전창기 등과 평택노농협의회를 조직하고 평택농민조합을 지도하며 활동하던 중 1932년 11월 26일 소위 ‘평양사범학교 학생적화사건’의 용의자로 검거되었다. 2년여의 조사와 심문을 받고 1934년 11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 480일 통산)의 형을 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 2개월여의 잔여 형기를 치르고 1935년 2월 1일 만기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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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주 판매업을 경영하는 한편 1937년 12월 동아일보 평택지국의 기자로 임용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1935년 10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최웅진(崔雄鎭), 남남덕(南男德)과 함께 공산주의사상을 전파하고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의 패망을 언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가 체포되어 1939년 8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육군형법,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미결 300일 통산)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41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해방 후 평택민청을 조직하고 1946년 10월 사건 등에서 활동하였다가 체포되어 1947년 3월 31일 징역 2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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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부 종로 3정목 47번지의 담배 가게(丸煙商店) 주인 이종필(李鍾弼)이 1943년 5월 8일 병기헌납자금으로 1만원을 헌납하였다. 이 외에도 유기그릇 200점과 일본동화 450매를 헌납하였다(『매일신보』1943.5.9.). 병기헌납자금 1만원 기부자와의 동일인 여부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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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벙위반사건 검거에 관한 건」(1938.7.22.), 『사상에 관한 정보』 10.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동아일보, 『평택항일독립운동사』

『동아일보』 1932.12.16.·28., 1933.8.20., 1933.12.27., 1934.11.27., 1937.12.19., 1938.9.21.

『민보』 1947.3.5.; 3.16.; 4.1. 『독립신보』 1946.12.24.; 1947.3.5.

사진 이춘응 李春應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504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77.07.19. ~ 1956.08.10 계열 의병
포상훈격 애국장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현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사람이다. 1907년 7월 경성 북서 안동(安洞) 출신 김성완(金聖完)과 함께 양근 수회리에 가서 의병장 권득수(權得壽)의 의병부대에 들어가 춘천, 홍천, 화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12쪽.

사진 이택화 李宅和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150 /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덕우리 295
이명 - 형량 징역 5년
생몰년도 1884.11.11. ~ 1974.03.29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애국장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현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사람이다. 12세에 성공회에 입교하였고, 청북면 덕우리에 성공회 회당을 건축하고 선교활동에 열중하였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구현, 오창선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1920년 2월 18일 안구현, 오창선과 함께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 김태연(金台淵)의 집의 뒷문 옆 토담 2척을 무너뜨리고 거실로 들어가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문서를 보이고, 모형 권총을 꺼내어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김태연은 돈이 없다고 대답하였으나 안구현 등은 옷상자 속에서 1원 지폐 100 묶음을 발견하여 가져갔다.
이택화와 오창선은 군자금 모금을 계속하여 진위군 포승면 내기리 이민화(李敏和)의 집에 가서 오창선은 망을 보고, 이택화는 안구현으로부터 전해받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문서를 보이며 1,000원을 내놓으라 하였고, 다음날인 3월 19일 110원을 모금하였다. 이후 일경에 피체되어 이택화는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훈격이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안구현 판결문」(경성지방법원 : 1920.04.28.).

사진 이희성 李熙成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123 / 동경시 赤阪區 溜池 山本方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6.12. ~ 미상 계열 일본방면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평택동) 출신이다. 1927년 11월 동경에서 절도죄를 범하여 징역 6월에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1933년 경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의하면 이의승(李義承)과 동일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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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이희성)』.

사진 이희수 李喜秀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122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14.08.07.~미상 계열 국내항일 (무정부주의)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평택동) 사람이다. 1931년 10월 01일 경기도 진위 대표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장, 신간회 중앙위원장 선임을 위한 선거에 참여하였다. 1932년 9월 고향인 평택에서 이종필(李鍾弼), 전창기(全昌基) 등과 평택노농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소위 ‘평양사범학교 학생적화사건’의 용의자 이종필이 검거된 다음날인 11월 27일 평택리의 全昌基(李喜秀)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희수는 경기도경찰부의 조사를 받고 1932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되었으나 1932년 12월 26일 전창기와 함께 불기소로 방면되었다. 그는 1935년 10월부터 1938년 2월까지 1938년 최웅진(崔雄鎭), 이종필(李宗弼) 등과 함께 공산주의사상을 전파하고, 중일전쟁 후 일본의 패망을 주장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법 위반 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근우회 전국임시대회 상황보고」(1928.7.18.). 「근우회 임시전국대회 개최 상황」(1928.7.21.).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군형법 위반사건 검거에 관한 건」(1938.7.22.).

『동아일보』 1932.11.30.;1932.12.13.;1932.12.14.;1932.12.20.

『삼천리』 제3권 10호, 1931.10.

사진 임인선 林仁先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83 ~ 미상 계열 의병
포상훈격 -
1908년 초 평택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후 해산된 군인 등이 의진에 참여하면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임인선도 이 후기의병의 일원으로 평택지역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관련자료

「폭도 가맹 명부에 관한 보고」, 『폭도에 관한 편책(경남북, 전남북, 충남북)』(19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