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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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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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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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광일 崔光一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당거리 314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9.08.27.~미상 계열 만주방면(간도공산당)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 당거리(현 평택시 오성면 당거리) 사람이다. 1930년 5월 30일에 있었던 제4차 간도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제4차 간도공산당사건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연변당부가 주도하여 일제와 장학량 군벌세력을 몰아내는데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참여한 항일 무장봉기였다. 당시 내건 슬로건에는 일본 제국주의 및 일체의 제국주의를 타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광일을 비롯한 54명이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최광일은 1931년 1월 26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치되었고, 동년 2월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1933년 1월 18일 예심 면소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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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중앙일보』 1932.12.28. <면소된 118명 금년내 출옥 불능>.

『중앙일보』 1932.12.29. <간도공산당 사건 관계자 390명의 주소 씨명>..

사진 최구홍 崔九弘
본적/주소 경기도 용인군 남산면(생지) /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181(본적 및 주소)
이명 - 형량 징역 1년
생몰년도 1891.05.25.~1979.10.13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용인군 남사면 출생이나,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를 본적으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그는 진위군 북면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최구홍이 사는 진위군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3월 31일 태극기를 제작하는 데 일조하였고 오후 4시 경부터 동 6시 경에 걸쳐 미리 만들어 두었던 태극기 30개를 꺼내 봉남리의 4백 여 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북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또한 북면의 각 동리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고, 항소하여 1919년 8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0년 4월 28일 석방되었다. 2004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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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중앙일보』 1932.12.28. <면소된 118명 금년내 출옥 불능>.

『중앙일보』 1932.12.29. <간도공산당 사건 관계자 390명의 주소 씨명>..

사진 최만화 崔晩華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 169 / 경기도 진위군
이명 최만엽 형량 징역 6월
생몰년도 1895.10.06.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현 평택시 오성면 안화리) 사람이다. 최만화는 1919년 안화리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 주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평택지역 곳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영향을 받은 최만화는 같은 마을 주민 안선문(安善文)·황순태(黃順泰)·정수만(鄭水萬)·홍기성(洪奇成)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들 및 백봉리, 안화리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최만화는 치안을 방해하였다는 죄로 1919년 5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관련자료

「최만화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경성복심법원: 1919.07.05.).

사진 최삼준 崔三俊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칠괴리 / 경기도 경성부 숭인동 61-47
이명 山本三俊 형량 징역 6월
생몰년도 1917.10.05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송탄면 칠괴리(현 평택시 칠괴동)에서 출생하여 경성부 숭인동에 거주하며 생활하였다. 그는 전시체제와 강제동원체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였다가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1942년 1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3년 6월 28일 출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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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최삼준)」.

사진 최선유 崔善有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수월암리 (출생 및 본적) / 경기도 진위군 북면 은산리
이명 - 형량 징역 6개월
생몰년도 1888~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서탄면 수월암리(현 평택시 서탄면 수월암리)에서 1888년 태어났으며 북면 은산리(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서 활동했다. 1919년 은산리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정경순과 함께 4월 1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는 은산리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부르자’고 선동하여 마을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더욱이 최선유는 마을사람들에게 ‘이면 봉남리(鳳南里)순사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외치자’고 권유하였고, 마을사람들은 그를 선두로 주재소로 몰려가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최선유는 치안을 방해했다는 죄로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1919년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로 감형되었다.
관련자료

「최선유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경성복심법원: 1919.07.05.)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Ⅰ, 1967년, 530쪽.

사진 최수일 崔壽日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당거리 314 (출생 및 본적) /
이명 平山壽日, 崔基俊, 李春山 형량 징역 2년6개월
생몰년도 1908.08.27 ~ 미상 계열 국내항일(조선공산당재건공작위원회)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 당거리(평택시 오성면 당거리) 사람이다. 1920년대 말~1930년대 중반 노농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26년 중국의 요녕성 고산둔에서 고용농으로 생활하면서 공산주의를 수용하여 고려공산청년회 고산둔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길림에서 이동휘, 김철수, 윤자영 등의 주도로 설립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소속되어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31년 1월 귀국하여 동년 2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흥남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1931년 6월 노동자와 농민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선전하고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회를 조직한 혐의로 용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3년 간의 조사와 신문 끝에 1934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2년 6월을 언도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5년 3월 15일 만기출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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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매일신보』 1934.06.26., 7면, <姜文秀等工作委員會事件 一律로 寬大한 判決, 사실인정에 새로운 해석이 있어 關係方面에선 注文>.

『동아일보』 1935.03.17., 2면, <再建工作委員 姜崔兩人出獄>.

「최수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495쪽.

사진 최웅진 崔雄鎭
본적/주소 경기도 수원군 수원읍 남수리 139 (출생 및 본적)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 355
이명 - 형량 징역 1년
생몰년도 1916.08.29~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수원군 수원읍 남수리 사람으로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현 평택시 통복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1935년 10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이종필(李鍾弼), 남남덕(南男德)과 함께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의 패망을 언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37년 8월부터 경성부 예지정 88번지의 『商工界』라는 월간잡지사를 아지트로 삼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계획하고 잡지 『商工界』 봉투 속에 좌익서적을 넣어 우편으로 조선 내 각지에 보내었다. 또한 그는 이종필과 함께 중일전쟁 후의 전시상황과 향후 일본의 패전을 이야기 하여 한인들에게 일제의 통치에 대한 반감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이두종(李斗鍾)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전파하여 그가 평택독서회를 조직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8년 3월 23일 “공산주의자 이종필과 연락을 취하며 시국에 대한 조언비어를 하여 민심을 동요시킨 자”로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종필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최웅진은 1939년 8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1년(미결구류일 통산)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0월 26일 출소하였다. 출소한 직후인 1939년 7월 1일 그는 수원군 매향정에서 이두종, 예난기, 이기석, 신태호 등과 향인좌(鄕人座)라는 연극단체를 조직하고 모종의 활동을 하려다가 일제의 감시를 받자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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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평택독서회사건 검거에 관한 건」(1938.7.25.), 『사상에 관한 정보 10』.

「소화12년6월 이래 중요사건의 검거상황-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법 위반」,

『치안정황』(1938.9).

『동아일보』 1938.07.02., 2면, <商工界事件二名을 送局>.

「극단을 가장한 불온계획에 관한 건」(1939.11.21.), 『사상에 관한 정보 12』.

사진 최인태 崔仁泰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수월암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문화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서탄면 수월암리(현 평택시 서탄면 수월암리) 사람이다. 1930년 오산공립보통학교 6학년에 재학 중 방학을 이용하여 강호섭과 함께 동리에 가난한 아이들 30여명을 상대로 한글강습과 기타 산술, 습자 등을 가르쳤다. 이를 바탕으로 학예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순박한 농촌의 문맹을 퇴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을 상대로 야학을 운영하였다.
관련자료

『동아일보』 1930.10.27. <보교생 2명 농민야학창설>.

사진 최종화 崔鐘和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중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 안중리(현 평택시 안중읍 안중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안중리로 돌아와 안중시장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이후 일어난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3월 1일 정오부터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 33인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 많은 군중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행된 이 3·1운동은 경기남부지역으로 전파되어 3월 9~10일에는 진위군 각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최종화는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경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태극기를 만들었고 이를 안중시장에서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 객관적인 자료에서 활동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관련자료

평택문화원,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2004, 301쪽.

사진 최항진 崔恒鎭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178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81.11.09. ~ 1919.04.30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국장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죽백리 마을의 구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2천여 명이 참가한 원곡면·양성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면사무소가 있던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의 양성면 경찰관주재소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귀가하던 1천여 명의 양성면민을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루어 양성면 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지에서 시설을 훼손하고 집기를 파손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최항진은 원곡면 죽백리 마을을 이끄는 구장이었는데,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 시위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30일 안성 경찰서장이 죽백리 마을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관청을 방화 파괴한 시위자를 색출할 때 최항진은 마을의 대표로 일경들의 만행을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들에게 매를 맞고 순국하였다. 199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공훈록에는 1919년 4월 30일 순국했다고 되어있으나 1919년 6월 8일 신문조서가 작성된 것으로 보아 최항진의 사망 일시는 명확하지 않다.
관련자료

「증인 최항진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3: 三一運動 XIII, 1995.

『독립유공자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