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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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병돈 徐炳敦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76 /
이명 徐內勳 형량 징역 1년 3월
생몰년도 1899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1899년 경성부 서소문 밖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2천여 명이 참가한 원곡면·양성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면사무소가 있던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의 양성면 경찰관주재소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귀가하던 1천여 명의 양성면민을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루어 양성면 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지에서 시설을 훼손하고 집기를 파손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서병돈은 원곡면과 양성면의 시위에 참여하였고, 특히 4월 2일 새벽 양성면에서 원곡면으로 돌아오던 중 이양섭의 친척을 구타한 토지조사국의 한인 기사를 구타하고 기계를 훼손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서병돈은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1년 3개월(미결구류일수 형기 산입)을 받았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서병돈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5, <서병돈 신문조서>, <의견서>, <예심청구서>, <공판시말서>.

사진 서병창 徐丙昌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 150 / 경기도 경성부
이명 徐內勳 형량 징역 1년 3월
생몰년도 1911 ~ 미상 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현 평택시 오성면 숙성리) 사람이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전개하였다.
서병창은 1928년 경성(京城)의 경성농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929년 11월에서 1930년 3월 사이, 광주지역에서는 일본학생이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라는 말을 하며 무시한 것을 계기로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성농업학교 2학년생이던 서병창은 1930년 초 이 소식을 듣고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1931년 7월 31일부터 8월 말까지 남자 41명, 여자 20여명 가량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관련자료

「경기도학생동요사건 퇴정학 생도의 처분표에 관한 건」(1930.6.9.), 『사상에 관한 정보철』 6책.

『동아일보』 1931.09.01., <제1회 학생브나로드운동>.

사진 서완득 徐完得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현 평택시 죽백동) /
이명 鳳五, 炳五 형량 징역 1년 3월
생몰년도 1886.04.16.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농업에 종사하던 서완득은 1919년 4월 1일 원곡면·양성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2천여 명이 참가한 원곡면·양성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면사무소가 있던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의 양성면 경찰관주재소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귀가하던 1천여 명의 양성면민을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루어 양성면 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지에서 시설을 훼손하고 집기를 파손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서완득은 원곡면과 양성면의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1년 3개월 받았다. 2016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국사편찬위원회,

「신문조서(서완득)」,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23·24권, 1986.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서완득)」

「서완득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사진 송종학 宋鍾鶴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76 ~ 미상 계열 의병
포상훈격 -
진위군 오성면(현 평택시 오성면) 사람이다.
송종학은 1906년 음력 2월 임용대(林容大)와 협의하여 경기도 재령군에서 유성구(劉成九)의 아버지 유도사(劉都事)에게 유성구의 섬 도피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1908년 음력 6월 경기도 수원군 북문 내 모상점에서 금 60원을 모금하였다.
관련자료

「현학손판결문」 (경성지방재판소, 1909.6).

사진 신순우 申淳雨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고잔리 /
이명 申源 형량 -
생몰년도 1923.01.09.~1992.03.12 계열 중국방면(광복군)
포상훈격 애국장
진위군 청북면 고잔리(현 평택시 청북읍 고잔리) 사람이다. 신순우는 평택에서 1923년 1월 태어났다.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입대하여 군사를 모집하는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1941년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대표적인 사업이 대한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부대 편제를 갖추었다.
광복군은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중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는데, 임시정부의 선전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기 위한 광복군의 선전활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복군의 창설과 더불어 ‘당면전략’을 통해 한국민족의 항일투쟁에 대한 대외적인 선전과 병력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선전을 병행하게 되었다.
1934년 경성의 신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1945년 광복군 징모 제3분처에 지하공작 책임자로 임명되어 초모공작 및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훈격이 상향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사진 신창우 申昌雨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고잔리 / 경기도 경성부 와룡동 88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8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청북면 고잔리(현 평택시 청북읍 고잔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1일 정오부터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 33인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을 중심으로 한 군중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시가행진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친께 한문을 배웠고 이후 경성부 와룡동 88번지에 거주하며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던 신창우는 1919년 3월 1일 점심을 먹고 하숙집을 나와 책방에 들렀다가, 오후 2시경 종로의 종각 부근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탑골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하고 기쁜 마음으로 군중에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군중들과 함께 대한문(大漢門)에서 서대문, 서대문에서 본정통(本町通)으로 가는 시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5시경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관련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신문조서(신창우)」,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3권, 1986.

사진 신태호 申泰虎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평택면 평택리 121 /
이명 - 형량 집행유예
생몰년도 1914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평택동) 사람이다. 1935년 11월 경 이두종(李斗鍾)과 협의하여 평택독서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평택독서회는 이두종이 주도한 독립운동단체이다. 병남면 신대리 384번지 출신인 이두종(1916~1997)은 사회주의적 성격의 평택독서회를 조직하고 신대리 등지의 회원들에게 사회주의의식을 고취하고 중일전쟁 직후의 전황을 말하며 반전사상을 전파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두종은 1933년 6월 경 자신의 마을에서 신태호, 이영선, 한철수, 민태옥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과 공산화를 목적으로 하는 ‘단목회(檀木會)’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매월 15일 사회주의서적을 읽고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두종은 1935년 11월 자신이 농사훈련소에 입소하면서 소멸된 단목회의 세력을 만회하고자 신태호, 이병선, 김상열, 유경식, 송종식, 이명재, 조돈세, 박윤길, 김진립 등과 평택독서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이두종은 회원들과 「메이데이의 의의」, 「자본주의의 기구」, 「변증법적 유물론」 외 수종의 사회주의 서적을 교재로 독서회를 개최하고 의식을 고양하였다. 이두종은 1938년 3월 중순 같은 마을 박룡주의 집에서 마을 사람인 김용덕, 우상옥, 박원길, 정상득, 용영기 등에게 “금회의 사변에서 장개석은 소련, 영·미 등 각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항일전을 계속함으로써 조속히 해결될 것이다. 결국 세계대전으로 진전할 수밖에 없다. 최근 소련의 비행기는 용감하게 도쿄와 오사카를 폭격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출현하였다.”라는 취지의 이른 바 ‘조언비어’를 하였다.
신태호는 1938년 평택독서회에 참가하여 일제의 전황을 전파하고 사회주의서적을 읽음으로써 반전의식과 민족의식,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8년 2월 평택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된 신태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신태호(1) 신태호(2)
관련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신문조서(신창우)」,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3권, 1986.

사진 심인택 沈仁澤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 율포리 210 / 평안남도 평양부 창전리
이명 - 형량 징역 2년
생몰년도 1903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고덕면 율포리(현 평택시 고덕면 율포리) 사람이다. 그는 수진농민조합에 가담하여 소작쟁의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했다.
수진농민조합은 1930년 3월 10일 진위군 북면 야막리 박규희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농민조합운동의 경우 중 유일하게 수원과 진위의 2개 군에 걸쳐 창립된 수진농민조합은 수원과 진위가 황구지천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어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경제적으로나 생활권의 차원에서 보면 동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2개 군에 걸쳐 조직될 수 있었다. 수진농민조합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1931년 2월 집행위원회를 열었으며, 강우형을 의장에 선출한 후 박승극, 남상환, 김영상, 박두희 등을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심인택(1) 심인택(2)

조직을 재정비한 수진농민조합은 소작쟁의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에 일제는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을 탄압하고 감시를 삼엄히 하였다. 이때부터 수진농민조합은 적색농민조합으로 성격을 바꾸게 된다.
수진농민조합을 적색농민조합으로 바꾸기 위해 김영상은 조직원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조직을 정비한 후 농조의 확대, 강화를 위한 활동에 들어가 지부조직을 위해 소작쟁의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수진농민조합은 투쟁을 통한 조직방침을 세웠다. 이들은 투쟁을 통해 민중의 정치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농조의 확대, 강화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이러한 조직방침 아래 수진농민조합은 1931년 10월 용소리와 황구지리에서 소잭 쟁의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 소작쟁의를 계기로 일제에 조직이 노출되게 되면서 그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심인택은 1930년 경성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시흥군 영등포에서 중외일보 영등포지국을 경영하였다. 이때 조선공산당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검거로 해외로 도피하였던 이종림과 교류하면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1930년 8월 이종림의 지도하에 서정리를 중심으로 진위소년동맹, 진위청년동맹을 창립하여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수원경찰서에 집회가 금지되어 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러던 도중 수진농민조합의 김영상을 만났다. 그는 김영상에게 농민운동에 대해 지도하였고, 지금까지의 운동방침을 폐기하고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수진농민조합은 적색농민조합으로 성격을 바꾸게 된 것이다. 심인택은 김영상과 함께 황구지리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1931년 10월 소작쟁의 주도한 혐의로 수원경찰서에 의해 검거되어 조사를 받고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931년 2월부터 영등포를 중심으로 이화수, 이종림, 양명, 최성우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단체인 ‘오거나이저 그룹’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평양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받아 1937년 2월 17일 출소하였다.
관련자료

『동아일보』 1930년 3. 13. 3면 7단, <진위농조창립>.

『중앙일보』, 1932.01.16. 2면, <수원농민조합사건 박승극등 5명 기소>

『매일신보』, 1932.09.07. 7면, <농민적화계획코자 비밀결사를 조직, 송국이래 구개월만에 징촌예심판사가 출장조사>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發覺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4.02.07.) 「共産大學卒業生檢擧에 관한 件」(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1937.6.18.)

「昭和十二年 六月 以來 重要事件의 檢擧狀況 - 共産大學卒業生檢擧」(경성지방법원 검사국 :1938.09)

「심인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조성운, 『일제하 수원지역의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3.

김경일편, 『한국민족해방운동사자료집』4

사진 심헌섭 沈憲燮
본적/주소 충북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
이명 - 형량 징역 8월
생몰년도 1888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충북 보은군 삼승면 사람으로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현 평택시 비전동)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에서 약 150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당시 비전리에서 농업을 하던 심헌섭은 3월 10일 평택 구락부에서 독립만세를 발기하였다는 이야기를 이도상(李道相)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3월 11일 평택 장날에 시내에 나가 우편국 앞 등지에서 이도상(李道相), 한영수(韓泳洙), 목준상(睦俊相) 등과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사건 직후 그는 다른 12명과 함께 검거 되었다.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심헌섭은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언도받았고, 항소하였으나 5월 5일 경성복심법원,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고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金正明 편, 高제6763호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13報)」(1919.03.1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352쪽

『매일신보』 1919.03.25., 3면, <騷擾事件의 後報>

「심헌섭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4.11., 경성복심법원: 1919.05.05., 고등법원: 1919.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