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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하 |
姜永夏 |
본적/주소 |
충청남도 평택군 남면 (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 |
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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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미상 |
계열 |
의병 |
포상훈격 |
- |
충청남도 평택군 남면(현 평택시 팽성읍) 사람이다. 학생 출신으로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경 15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충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관련자료
「폭도수괴조사표」(1921.02.01.), 『폭도에 관한 편책』(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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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건 |
姜泰建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본정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미상 |
계열 |
국내항일(대한독립의군부) |
포상훈격 |
- |
진위군 팽성면 본정리(현 팽성읍 본정리) 사람이다. 그는 1912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임병찬(林炳瓚) 등이 조직한 보황주의적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에 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2년 고종황제로부터 칙서를 받은 임병찬이 조직한 단체이다. 임병찬은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격문을 발표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 일제의 호남의병대토벌로 숨어 지내던 의병들에게 고종의 내밀한 원조에 의해 독립의군부가 결성된 취지를 전달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 조직을 확대하고 강화시켜 나갔다. 투쟁방법으로 의병의 무력투쟁을 포함하여 다양한 항일투쟁을 계획했다. 우선 총독부·각국공사·일본정부에 각각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일제 관헌들에게 한일병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국외에 한국인이 일본의 통치에 계속 항거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 국민 투서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거사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조직원이 일경에게 체포되어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강태건은 1913년 3월 하순 같은 마을 출신 이일영, 윤상보와 함께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 3백원을 모아 대한독립의군부원 김재순에게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관련자료
「김재순 등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3.8.13.)」.
『매일신보』 1913.08.13. 2면 <世稱 獨立義軍府事件>.
『매일신보』 1913.07.06.; 07.14.; 08.0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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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준 |
康漢駿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원정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25.05.17.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포승면 원정리(현 포승읍 원정리) 사람이다. 평택에서 태어나 1938년 기계과 자격증을 취득하였으며, 1940년 인천시 중구 도원동에 있는 중앙상공사 기계 공장을 인수·경영하였다. 이 때 공장을 방문한 일본인 소방서장으로부터 장차 조선 사람들은 모두 만주로 이주시킬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항일 투쟁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1942년 황선학(黃善鶴), 조규진(曺圭鎭)과 마음을 합해 황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모두 98명의 동지들을 규합했다고 한다. 1944년 10월 3일 국내의 철교와 군수 공장을 폭파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로 결정하고 화약과 도화선 등 폭파에 필요한 제반 조직을 절취(竊取)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화약을 도난당한 것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의 전국적인 수색에 폭발물을 빼앗기면서 거사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관련자료
평택시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 2001, 957~9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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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섭 |
康昊燮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탄면 수월암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서탄면 수월암리(현 평택시 서탄면 수월암리)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야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오산공립보통학교 6학년에 재학 중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최인태(崔仁泰, 崔寅泰)와 함께 동리에 야학을 열어 가난한 아이들 30여명을 상대로 한글과 기타 산술, 습자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동년 11월 15일부터 농민야학을 다시 열어 취학하지 못한 가난한 아이들의 문맹 퇴치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관련자료
『중외일보』 1930.09.15., <서탄야학성황, 강 최 양군의 열성으로>.
『동아일보』 1930.10.27., <보교생 2명 농민야학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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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만 |
高再萬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석봉리 91 / |
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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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 ~ 1943.02.23 |
계열 |
일본방면 |
포상훈격 |
- |
진위군 팽성면 석봉리(현 팽성읍 석봉리)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오사카에서 유학하던 중 을축대홍수로 수해를 입은 이재민을 위한 구호 활동을 하였다. 1934년 오사카에 위치한 재일본조선기독교인대회 관서중회(關西中會) 오사카북부교회의 주도인물로 활동하였다.
관련자료
「사회운동의 상황」(1934),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 3, 1461쪽.
『시대일보』 1925.7.30., <대판유학생 구제회 조직>
『시대일보』 1925.8.24., <조선구제회에 온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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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록 |
孔在祿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421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421 |
이명 |
이재록 |
형량 |
징역 1년 6월 |
생몰년도 |
1895. 01. 15~1960. 12. 15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오성면 학현리 3·1운동 주도자로 마을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919년 4월 초에는 경기도 안성군, 수원군, 진위군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진위군 내의 각 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진위군 오성면의 학현리에서도 4월 3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학현리 421번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공재록은 같은 마을에 살던 김용성(金容成), 이사필(李思弼)과 함께 인근의 봉오산(鳳梧山) 위에서 주민 12~13명과 봉화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체포된 공재록은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김정명 편, 「4月3日における各地の狀況報告の件」(1919.04.04.) 朝鮮軍司令官→陸軍大臣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94쪽.
국가보훈처, 「공적조서(공재록)」. 『독립유공자공훈록』.
「공재록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5.20., 경성복심법원: 191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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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민상 |
駒城民相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만호리 / 동경시 淀橋區 戶塚町 2-144 金坂智吉 方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19 ~ 미상 |
계열 |
일본방면 |
포상훈격 |
- |
진위군 포승면 만호리(현 평택시 포승읍) 사람이다. 동경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중 시국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1940년 3월 이후 동경에서 인쇄기계 직공으로 일하던 중 1938년 소련과 만주의 국경에서 소련군과 일본군의 충돌한 장고봉 사건, 1939년 만주와 몽골의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일본군과 몽골·소련군이 충돌한 노몬한 사건 후의 일본의 향후 전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는 “노몬한, 장고봉사건에서 소련은 구주의 사정으로 사건을 확대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국력이 저하될 즈음 소련이 도전하여 오면 일본이 패배할 것은 필연이다.”라는 등의 ‘조언비어(造言蜚語)’를 한 죄로 1941년 2월 25일 검거되었다. 3월 20일 육군형법 위반으로 송국되었고, 6월 9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관련자료
「사회운동의 상황」(1941),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 4, 9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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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수 |
權益洙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북면 가곡리 313 / 경기도 경성부 신교정 8 |
이명 |
權泰彙 |
형량 |
태 90, 징역 10월, 징역 1년 6월 |
생몰년도 |
1899. 11. 22~미상 |
계열 |
3.1운동,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북면 가곡리(현 진위면 가곡리) 사람이다. 1899년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경 진위에서 진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으며, 1915년 이봉래(李鳳來)가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경성 봉명(상업)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선배와 동기들과 생활하며 민족의식을 강화하였다.
그는 3·1운동의 거사 계획을 듣고, 경성의전 선배들이 주도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시내 시위를 목도하였다. 그는 1919년 3월초 자신의 고향인 진위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포승면 희곡리의 이민백을 찾아갔다. 권익수는 이민백에게 “나는 서울에서 온 학생인데 전국에서 온 민족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있는데 수원군과 진위군만 잠잠하고 있소. 만세시위의 기일을 다시 연락할 터이니 그때 동리 사람을 지휘하여 일을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진위지역 사람들도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권익수는 1919년 9월 22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이 드러나 경성복심법원에서 태 90대를 선고받았다.
권익수의 독립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20년 7월 독립운동자금 모집 관련하여 징역 10월을 받았다. 또 그는 감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자신이 부인이 징역 2년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한 슬픔을 맛보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권익수는 1921년 8월 유세관, 이시우, 이능우, 김희순, 이기하 등과 동년 11월 태평양회의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격문을 배포하여 조선인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권태휘(權泰彙)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1921년 경회루에서 개최되기로 한 황태자 봉축식을 반대하는 경고문을 작성하고 배포하였다. 경고문의 내용은 ‘슬프다, 우리 민족이여! 자각하여라! 자유 없는 우리 민족 모두여,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면서 적을 위해 봉축하는 자는 반드시 위험하니 주의하라. 기를 흔들지 마라. 봉축 장에 가서 참가하지 말라’라고 적었다. 이 일로 권익수는 1922년 2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23년 출옥한 이후에도 권익수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1923년 12월 인사동의 중앙예배당에서 혁청단(革淸團)을 조직하고, 학생풍기를 비롯한 사회풍기의 혁청을 위해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권익수는 혁청단의 노선을 무산계급문화를 확산하고, 무산계급전을 전개하는 쪽으로 전환하였다. 1920년대 일본의 조선에 대한 행정 자치 부여 소문이 돌고, 천도교 신파, 기독교, 동아일보사 등에서 자치운동을 추진하자 1924년 12월 21일 낙원동의 화요회관에서 ‘재경사회운동자간친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5년 사회운동단체와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는 1925년 9월 17일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개최된 ‘국제무산청년데이기념간담회’에 참석하였으며, 동년 12월 5일 조선노동당원 출옥자 위로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25년 7월 15일에는 ‘화요회’ 등의 제 사회단체 인물들과 ‘재경 각단체 유지대회’를 개최하였다. 1926년 4월 14일 ‘재경 각단체 유지대회’를 해산하고 정우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정우회선언에서 ‘파벌투쟁의 청산과 사상단체의 통일’, ‘대중의 조직화’,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전환과 민족협동전선의 전개, 이론투쟁’ 등의 노선을 발표하자, 권익수는 이에 동참하였다.
그는 1927년 2월 신간회의 발기와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1927년 10월 식간회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의 특별선전대원 등으로 경성지회의 조직 확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신간회가 존속한 1927년부터 1931년까지 그는 여러 번의 구금과 체포로 곤욕을 치렀다. 1927년 5월 17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회의에 참석하여 신간회 참여를 독려하다가 검속을 당하였다. 그리고 1928년 11월 3일 삼청동 자택에서 자다가 검거되었으며, 1929년 4월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 회의 야체이카 조직과 관련하여 체포되어 면소로 풀려나기까지 1년여의 가혹한 신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간회가 해소되고, 만주사변이 발생한 1931년 이후 권익수는 신조선사를 인수하여 잡지 『신조선』을 발간하고, 실학자 등 조선시대사상과의 전집과 문학전집을 발간함으로써 조선의 문화를 지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3년 황금정에 위치한 신조선사의 사장으로 여유당전서, 즉 『정다산선생전집』의 간행에 착수하였다. 또한 35,000원의 경비를 들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강역고』, 『대동수경』, 『아언각비』 등 정약용의 저서를 모아 76책의 전서를 간행하기로 하였다. 그 후 권익수는 간행책임자가 되고, 외현손인 김성진(金誠鎭)이 편찬자,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을 맡아 작업을 한 결과 1938년 10월 27일 『여유당전서』 400부를 간행하였다. 그는 1937년 조선시대 정시한(丁時翰)의 저술을 모아 『우담선생문집(愚潭先生文集)』을 편찬하였으며, 1939년 1월 영조대의 가정실학자이고 규수문학의 최고봉인 이씨의 문집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를 간행하였다. 1939년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 신경준의 『여암전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939년 박종화, 김동환, 한설야, 엄홍섭 등과 함께 회월 박영희의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권익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22일 건준중앙위원회에서 1국 12부로 조직을 확대하였을 때 그는 이승복(李昇馥)과 함께 교통부를 담당하였다. 그는 1945년 9월 6일 오후 9시 경기고녀강당에서 개최된 건준, 전국인민 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는 건준 교통부 부원에 선임되어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지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권익수는 1946년 1월 3일 오후 1시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시민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동원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회장 홍명희(洪命熹), 부회장 정로식(鄭魯湜)과 함께 이 대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1946년 초 신탁통치 문제로 제 정당·사회단체가 좌파와 우파로 분립되었을 때, 권익수는 2월 19일 결성된 좌파의 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46년 2월 23일 김철, 권동욱 등 22명과 함께 민전 식량대책위원에 선임되었다. 또 그는 1946년 4월 8일 여운형(呂運亨),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를 적극 지지하는 민전 주최의 시민대회를 4월 11일 오후 2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열기로 결의하고, 42명을 지휘하는 운동부 책임 위원에 선임되어 이 행사를 개최를 준비하였다.
1947년 2월 7일 오후 11시 반 삼청동에 있던 그의 집에 십여 명의 ‘테러단’이 침입하였다. 그의 신체는 훼상되지 않았으나, 그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이처럼 그는 정치적인 노선이 달랐던 집단과 인물로부터 위협과 공격을 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권익수는 1949년 11월 문교사회위원회의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문교부 공보처에서 초안한 공연법을 폐기하고, 공연법 초안을 기초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50년 6·25전쟁 전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현재 그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련자료
「권익수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09.22. 경성지방법원: 1921.11.22.)
「권익수 희생정부 조직 및 독립격문 배포사건 경찰신문조서」(1921.09.15.),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55, 2003.
「권익수 경찰신문조서(2회)」(1921.09.18.),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55, 2003.
「권익수 검사신문조서」(1921.09.29.),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55, 2003.
『동아일보』 1921.09.30. 3면 <東宮殿下御歸朝奉祝日에 「일본국긔를 달지말라, 봉촉을 하지말라」는 불온문서를 돌린 權益洙는 검사국에>.
『동아일보』 1921.10.11. 3면 <立團女子部의 명의로 불온문서를 배부한 權益洙, 황태자봉축당일 사건, 작일 지방법원 공판에>.
「권익수」, 『왜정시대인물사료』 2.
『동아일보』, 『매일신보』, 『중외일보』, 『시대일보』, 『경향신문』, 『자유신문』, 『중외경제신보』.
『고등경찰관계연표』.
「권익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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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진 |
金晩鎭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서울 종로구 누상동 125) / 중국 阜陽 제3지대병영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19.02.12. ~ 1992.04.12 |
계열 |
중국방면(광복군) |
포상훈격 |
애족장 |
평택 사람이다. 그는 해방 직전 광복군에 가담하여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에게 전쟁의 상황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1941년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대표적인 사업이 대한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부대 편제를 갖추었다.
광복군은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중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는데, 임시정부의 선전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기 위한 광복군의 선전활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복군의 창설과 더불어 ‘당면전략’을 통해 한국민족의 항일투쟁에 대한 대외적인 선전과 병력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선전을 병행하게 되었다.
김만진은 1944년 중국 푸양(阜陽)에서 광복군 제3지대에 속하여 광복군을 모집하는 초모 공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주해오는 한인과 일본부대에 근무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 활동과 광복군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김만진은 광복군 제3지대와 함께 중국의 류자이(劉塞), 텐진(天津) 등지에서 특파단원으로 단장 신흥균(申興均), 부단장 박상기와 함께 ‘중국군의 군정포고문’ 등을 우리말로 옮겨 교포들에게 전달함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이들이 광복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초모공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 1975, 417쪽.
「광복군 김문택의 수기」, 한국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2.
『독립유공자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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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학 |
金奉學 |
본적/주소 |
진위군 팽성면 노와리 양천마을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79 ~ 미상 |
계열 |
의병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팽성면 노와리(현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 양천(楊川)마을 사람이다. 1908년 손명선의진(孫明先義陣)에서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1907년 고종황제 퇴위와 군대해산 등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김봉학은 1908년 4월 강영학(姜永學)·인문식(印文熄)·이달성(李達成)·손명선·이성순(李聖順) 등과 함께 충주(忠州)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8년 4월 20일 경 충북 충주군 복성면(福城面)에서 머물고 있던 중 충주경찰서에 탐지되어 4월 21일 새벽 일제 경찰의 습격을 받고 교전 중 체포되었다. 1908년 8월 25일 충주구재판소(忠州區裁判所)로 이송되어 1908년 12월 5일 이른바 강도 및 내란죄(內亂罪)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227~229, 455쪽.
『폭도에 관한 편책』, 제696호(1908.5.1.).
『형사제1심사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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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희 |
金鳳熙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 |
이명 |
- |
형량 |
태 90 |
생몰년도 |
1890.12.07.~1957.11.29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사람이다. 1919년 봉남리 3·1운동 주도자로 마을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봉남리는 천도교인이 많은 곳이었는데 3월 31일 대규모 인원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농업에 종사하던 김봉희는 박성백(朴成伯), 최구홍(崔九弘), 유동환(柳東煥), 전영록(全榮祿), 유만수(柳萬壽)와 함께 손병희 등이 제창한 조선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태극기 30장을 제작하고 사람을 모아 1919년 3월 31일 오후 4시부터 6시 경까지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에서 태극기를 배포한 후 약 400명의 군중과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관주재소 앞 등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매일신보』에 의하면 면장을 끌어갈 정도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자동차를 몰고 현장에 가서 진압을 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17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김봉희는 이에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았으나, 항소하여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 90을 받았다. 200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국가보훈처, 「공적조서(김봉희)」, 『독립유공자공훈록』.
「김봉희 판결문」(경성지방법원:1919.05.09., 경성복심법원: 1919.06.21.).
『매일신보』 1919.04.03., 3면, <면장을 끄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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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완 |
金商完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도곡리 150 / |
이명 |
- |
형량 |
1년 9월 7일 |
생몰년도 |
1903.07.15.~1942.05.17 |
계열 |
만주방면(국민부)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포승면 도곡리(현 평택시 포승읍 도곡리) 사람이다. 만주의 정의부와 국민부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27년 중국 무순현(撫順縣) 장당(章黨)에서 정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4월 재만한인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정의부·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가 국민부(國民府)로 재편되자, 국민부에 소속되어 국민부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경 일경에 체포된 그는 동년 7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징역 1년 9월 7일로 감형되어 1934년 5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조선혁명군정부 대원으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심양(瀋陽)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가을 귀국하였으나 병환으로 인해 1942년 5월 사망하였다.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동아일보』, 1932.7.29.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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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선 |
金承善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신궁리 /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신궁리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880~1919.03.01.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팽성면 신궁리(현 평택시 팽성읍 신궁리) 사람이다. 1919년 3~4월 평택의 독립만세운동 당시 맞아서 죽었다고 하나 활동 및 순국 사실이 객관적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에 1919년 3월 1일 신궁리에서 총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월 1일은 음력일 가능성, 혹은 기억의 착오일 수도 있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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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연 |
金時然 |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67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67 (현 평택시 죽백동) |
이명 |
致三 |
형량 |
징역 3년 |
생몰년도 |
1886.07.02.~1944.12.06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농업에 종사하던 김시연은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이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날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 하였다. 이러한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시연은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혐의로 인하여 1919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훈격이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매일신보』 1921.01.23.,3면, <被告等의 各處刑>
국가보훈처, 「공적조서(김시연)」
「최은식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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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
金永九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계열 |
학생운동(휘문고등보통학교) |
포상훈격 |
- |
진위군 사람이다. 경성부(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전개 하였다.
김영구는 휘문고등보통학교 3학년생이던 1928년 10월 22일 3학년생들과 문우회의 학생자치 및 학교의 운영에 학생대표 참가, 수신(修身) 선생의 근신, 기숙사 설치 등 7가지 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벌일 때 참여하였다. 문우회는 시인 정지용이 휘문고보 재학시절 학예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한 전통이 있던 교내학생모임이어서 학생의 자치를 획득하려 하였다. 그리고 민족 모멸적 행위를 한 교사에게 시정을 요구하고 민주적 교육행정을 성취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동맹휴학에 일경이 개입을 하여 학교에서 5명에게 퇴학, 94명에게 무기정학처분을 내렸을 때, 김영구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조치에 다른 학년학생들도 반발을 하여 4학년생들은 퇴학원을 제출하였으며, 1학년생들도 맹휴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련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徽文高普校生徒 動搖에 關한 件」.
『동아일보』 1928.10.23.; 1928.10.24.; 1928.10.25.; 192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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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상 |
金榮相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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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07.11.28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사람이다. 그는 수진농민조합의 주도자로써 평택의 농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수진농민조합은 1930년 3월 10일 진위군 북면 야막리 박규희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농민조합운동의 경우 중 유일하게 수원과 진위의 2개 군에 걸쳐 창립된 수진농민조합은 수원과 진위가 황구지천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어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경제적으로나 생활권의 차원에서 보면 동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2개 군에 걸쳐 조직될 수 있었다. 수진 농민조합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1931년 2월 집행위원회를 열었으며, 강우형을 의장에 선출한 후 박승극, 남상환, 김영상, 박두희 등을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조직을 재정비한 수진농민조합은 소작쟁의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에 일제는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을 탄압하고 감시를 삼엄히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수진농민조합은 적색농민조합으로 성격을 바꾸게 된다. 수진농민조합은 투쟁을 통한 조직방침을 세웠다. 이들은 투쟁을 통해 민중의 정치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농조의 확대, 강화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이러한 조직방침 아래 수진농민조합은 1931년 10월 용소리와 황구지리에서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 소작쟁의를 계기로 일제에 조직이 노출되게 되면서 그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김영상은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0년 3월 조선일보 서정리분국에서 기 자로 활동하면서, 남상환으로부터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1930년 여름부터 사창리 에서 야학강습소를 설립하여 미취학 아동 50명을 수용하여 「노동독본」과 기타 사회과학을 기초로 무산교육을 실시하고 혁명의식을 고양, 훈련시키기에 힘썼다. 1930년 8월 10일 조직된 진위청년동맹의 재무부를 담당하였다. 수진농민조합은 1930년 이래 지주의 과다한 소작료 징수에 항의하여 소작쟁의를 일으키고, 소작료 불납동맹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1년 5월 경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이종림과 심인택의 지도를 받아 적색농민 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장에 선임되었다. 조원에는 남상환, 박승극, 이원섭, 장주문등 이 있었다. 조직을 정비한 후 김영상은 농조의 확대, 강화를 위한 활동에 들어가 지부조직을 위해 용소리에서 소작쟁의를 지도했다. 이들은 1931년 10월 소작쟁의를 준비하고, 김영상은 10월 27일 황구지리에서 지부조직의 실천투쟁 방법을 협의하였다. 이렇게 준비한 황구지리 소작쟁의사건을 계기로 수진농민조합은 일제에 노출되고 말았다. 1931년 5월 7일 이종림에 의해 계획된 단체는 김영상에 의해 수진농민조합으로 구체화되었고, 김영상, 남상환 등 5명은 이 일로 기소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무죄로 방면되었다. 1933년 3월 28일 김영상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영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일제를 대상으로 미결구류 하루에 1월 이상 5원 이하의 보상금 청구소송을 냈다.
관련자료
『동아일보』 1930년 3. 13. 3면 7단, <진위농조창립>.
『중외일보』 1930.08.18, 4면, <진위청맹 설립대회경과>.
『동아일보』 1931.12.02. 2면, <소작쟁의는 승리 각처검속은 계속>.
『중앙일보』 1932.01.16. 2면, <수원농민조합사건 박승극등오명 기소>.
『매일신보』 1932.01.16. 2면, <농민층적화를 기도한 일파 일곱명 중에 다섯 명은 유죄 수원김영상등사건>.
『동아일보』 1932.01.17. 2면, <水原農組事件 五名豫審廻附>.
『매일신보』 1932.09.07. 7면, <표현단체는 수진농조 피면엔 지하운동 삼림속에서 회합밀의 미곡상으로 가장 코서로 련락 쟁의선동이 발각단서>.
『중앙일보』 1932.12.25. 2면, <수진농조사건 박승극 등 예종 이십삼일 경성법원에서 오명전부 유죄결정>.
『매일신보』 1933.01.26. 2면, <수원과 진위의 농민조합사건 수등경부틀 중인으로 심문 검사는 이년역구형>.
『매일신보』 1933.06.06. <수진농조사건무죄자 보상금 청구제소 사백여일 철창생활한 삼명이 일일일원이상청구>.
조성운, 「日帝下 水原地域의 農民組合運動」, 『동국역사교육』5, 1997.김경일 편, 『한국민족운동해방사자료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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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오 |
金永五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후사리 156-1 / 중국 북경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20.02.09. ~ 1993.06.26 |
계열 |
중국방면 (광복군)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청북면 후사리(현 평택시 청북면 후사리) 사람이다. 그는 광복군에 입대하여 북경에서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1941년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대표적인 사업이 대한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부대 편제를 갖추었다. 광복군은 중일전쟁에 가담하여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할 수 있도록 여러 연합작전을 펼쳤다.
김영오는 1931년 경성 제2고보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교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194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북경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광복군 북경지구 특파단 군수과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미군정청 조사연구소 조사과장을 지냈으며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1956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한국석유공업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93년 사망하였다. 1991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평택항일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평택항일독립운동사』, 2004, 337~338쪽.
『동아일보』 1993.06.27. 23면 <광복회원 김영오씨>.
『조선일보』 1993.06.29. 30면 <독립유공자 김영오씨>.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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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성 |
金容成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방림리 (생지)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388 (본적, 주소) |
이명 |
金溶成 |
형량 |
징역 1년 |
생몰년도 |
1894.09.13. ~ 1954.05.25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사람이다. 포승면 방림리에서 1894년 출생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3일 발생한 오성면 학현리 3·1운동의 주도자이다.
1919년 4월 초에는 경기도 안성군, 수원군, 진위군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진위군 내의 각 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진위군 오성면의 학현리에서도 4월 3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학현리 388번지에서 서당 한문교사를 하던 김용성은 공재록(孔在祿), 이사필(李思弼)과 인근의 봉오산(鳳梧山) 위에서 주민 12~13명과 봉화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용성은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소위 은사(恩赦)로 감형되어 1920년 4월 28일 석방되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金正明 編, 「4月3日における各地の狀況報告の件」(1919.04.04.) 朝鮮軍司令官→陸軍大臣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94쪽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김용성)」.
「김용성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5.20., 경성복심법원: 1919.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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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근 |
金元根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 /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미상~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 |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현 평택시 오성면 안화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청북면 백봉리 도로에서 안육만(安六萬)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일은 경기도 진위군의 평택(平澤)에서 3,0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와 더불어 부용면(芙蓉面), 고덕면(古德面), 북면(北面) 등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김원근은 안육만과 함께 조선독립만세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여 4월 1일 밤 청북면 백봉리 도로에서 큰소리로 “이 마을에서는 어찌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빨리 나와 부르자”라고 외쳐 마을주민을 모았고, 안육만, 최만화(崔晩華)·안희문(安喜文)·황순태(黃順泰)·홍기성(洪奇成)·정수만(鄭水萬)등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마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안육만 외 5인과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만세운동을 함께하였다. 판결문에 주도인물로 나오나, 기소되지 않아서인지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는다. 김승선 등 순국자의 이명일 가능성이 있다.
관련자료
「안육만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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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 |
金鐘國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 동고리 / 경기도 경성부 교남리 61 / |
이명 |
金澤鍾國 |
형량 |
징역 6월 |
생몰년도 |
1907.05.19.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고덕면 동고리(현 평택시 고덕면 동고리) 사람이다. 1942년 경 경성부 교남리 61번지에 거주하며 신발상인(靴下商)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전시체제 하 인력과 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위하여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협력을 강요하였을 때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였다가 체포되어 1942년 6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미결 120일 통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42년 8월 12일 출옥하였다.
관련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金澤鍾國, 金鍾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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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섭 |
金昌燮 |
본적/주소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87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87 |
이명 |
明集 |
형량 |
징역 3년 |
생몰년도 |
1885.03.13. ~ 미상 |
계열 |
3.1운동 |
포상훈격 |
애족장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양성면 주재소에 돌을 던지는 등 과격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2천여 명이 참가한 원곡면·양성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면사무소가 있던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의 양성면 경찰관주재소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귀가하던 1천여 명의 양성면민을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루어 양성면 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지에서 시설을 훼손하고 집기를 파손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김창섭은 1919년 4월 1일 원곡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원곡면민 약 1000명은 외가천리 소재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외치고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향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제등(提燈) 혹은 횃불을 들고 만세를 연호하였다. 김창섭은 양성면 주재소에 투석을 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김창섭은 1920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201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매일신보』 1921.01.23.,3면,<被告等의 各處刑>
국가보훈처, 「공적조서(김창섭)」
「최은식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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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진 |
金夏鎭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세교리 125 / 중국 개봉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24.01.25. ~ 1992.02.07 |
계열 |
중국방면 (광복군) |
포상훈격 |
애족장 |
진위군 세교리(현 평택시 세교동) 사람이다. 1944년 광복군에 입대하여 미국과의 연합 작전에 참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1941년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대표적인 사업이 대한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부대 편제를 갖추었다.
광복군은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합작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 추진하였다. 광복군과 OSS의 합작은 독수리작전이라 불리는데, 이 작전은 광복군 대원들을 선발하여 첩보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적후방공작을 전개하는 것이다. 독수리작전은 서안의 제2지대, 부양의 제3지대 대원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OSS대원들의 국내침투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키기 위한 국내진입작전의 세부적인 계획과 출동준비가 갖추어졌을 바로 그 순간에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김하진은 21살이 되던 해인 1944년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중국 북경 광복군 제3지대 에서 초모공작에 가담하였다. 1945년 김하진은 총책임자 엄도해(嚴道海), 훈련대장 윤영무(尹永茂)가 이끄는 O.S.S 훈련대의 훈련생으로 선발되어, 정보 수집 및 전달, 낙하산 침투 훈련 등을 받았다. 199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초모 공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 1975, 414쪽.
「OSS 훈련」,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 1975, 507쪽.
『동아일보』 1992. 02. 08. 14면, <독립유공자 金夏鎭(김하진)씨>
『경향신문』 1992. 02. 09. 18면, <독립유공 金夏鎭(김하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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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욱 |
金顯旭 |
본적/주소 |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가재리 527 / 경기도 경성부 숭인동 61-70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16 ~ 미상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 |
진위군 송탄면 가재리(현 평택시 가재동) 사람이다. 경성부 숭인동에 거주하며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활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지원 하에 조직된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산주의단체였다. 조선공산당은 독립 후 공산주의국가를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이념 하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 민족주의계열과 유일당운동을 전개하여 당을 해체하고 신간회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발표로 민족주의계열과 결별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의 재건운동을 초기 재건운동이라 하는데, 이 때의 재건운동은 각 분파들이 세력 경쟁에 몰두하여 새롭게 설립될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 다툴 뿐이었다. 때문에 코민테른에서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당조직에 실패하였다. 1933년부터 이재유를 중심으로 경성트로이카, 경성콤그룹 등의 새로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시작되었다.
김현욱은 1934년 경성농업학교 학생으로 수학하던 중 경성제국대학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 [三宅鹿之助]가 정태식(鄭泰植)·이재유(李載裕)·권영태(權榮台)와 함께 추진하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남만희, 임택재, 정룡산, 박일형이 지도하는 반제동맹 소속의 경성농업학교그룹의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활동을 제지하려던 일본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관련자료
「治安維持法違反被疑者李觀述의 手配 관한 건」(1937.07.23.), 京高特秘 제1865호-2, 국학자료원,
『한국민족해방운동자료집』8, 1997.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發覺에 관한 건」(1934.02.07.), 『思想에 關한 情報』7: 京西高秘 제8613호의 3, 『국내항일운동자료집;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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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환 |
南相煥 |
본적/주소 |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퇴계원리 /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서정리 430 |
이명 |
- |
형량 |
- |
생몰년도 |
1908.06.15. ~ 1933.04.19 |
계열 |
국내항일 |
포상훈격 |
애족장 |
양주군 별내면 퇴계원리 출신으로 진위군 송탄면 서정리(현 평택시 서정동)에 거주하였다. 성인이 된 후 평택으로 이주한 남상환은 이곳에서 진위청년동맹, 수진농민조합 조직을 주도했다.
수진농민조합는 1930년 3월 10일 진위군 북면 야막리 박규희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농민조합운동의 경우 중 유일하게 수원과 진위의 2개 군에 걸쳐 창립된 수진농민조합은 수원과 진위가 황구지천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어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경제적으로나 생활권의 차원에서 보면 동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2개 군에 걸쳐 조직될 수 있었다. 수진농민조합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1931년 2월 집행위원회를 열었으며, 강우형을 의장에 선출한 후 박승극, 남상환, 김영상, 박두희 등을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조직을 재정비한 수진농민조합은 소작쟁의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에 일제는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을 탄압하고 감시를 삼엄히 하였다. 이때부터 수진농민조합은 적색농민조합으로 성격을 바꾸게 된다. 수진농민조합을 적색농민조합으로 바꾸기 위해 김영상은 조직원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조직을 정비한 후 농조의 확대, 강화를 위한 활동에 들어가 지부조직을 위해 소작쟁의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수진농민조합은 투쟁을 통한 조직방침을 세웠다. 이들은 투쟁을 통해 민중의 정치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농조의 확대, 강화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이러한 조직방침 아래 수진농민조합은 1931년 10월 용소리와 황구지리에서 소잭쟁의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 소작쟁의를 계기로 일제에 조직이 노출되게 되면서 그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남상환은 1924년 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얼마 후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평택 서정리로 이사한 그는 조선일보 분국을 경영하였고, 서정리에 야학을 설치하여 무산교육을 실시하였다. 1930년 8월 서정리소년회를 진위소년동맹으로 바꾸는 동시에 진위청년동맹을 창립하여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 일로 평택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바 있다.
남상환은 1930년 3월 경기도 진위군(현 평택시)에서 수진농민조합을 창설하고 동년 8월 조선농민총동맹의 서기로 농민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하였으며, 1931년 11월 좀 더 적극적이며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형태인 수진적색농민조합을 조직했다. 소작쟁의를 주도 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33년 3월 16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보석된 지 한 달 만인 동년 4월 19일 사망했다. 200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동아일보』 1930년 3. 13. 3면 7단, <진위농조창립>.
『동아일보』 1930.10.16. 7면, <友誼團體와 聯絡을 禁止>.
『동아일보』 1931.02.25. 7면, <수진농조위원회>.
『동아일보』 1932.01.17. 2면, <水原農組事件 五名豫審廻附>.
『동아일보』 1932.12.24. 2면, <水振農組事件 六名公判에>.
『동아일보』 1933.03.21. 5면, <남상환씨 보석>.
『동아일보』 1933.03.28. 2면, <農組事件四名無罪>.
『동아일보』 1933.04.22. 3면, <수진농조사건 남상환씨 별세>.
조성운, 「日帝下 水原地域의 農民組合運動」, 『동국역사교육』5,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