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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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목준상 睦俊相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 병남면 합정리 /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합정리
이명 睦俊箱 형량 징역 8월
생몰년도 1891.01.06 ~ 1949.02.15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진위군 병남면 합정리(현 평택시 합정동)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에서 약 150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1일 당일은 장날이어서 평택역 앞에서 15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만세운동을 하고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 당시 합정리에서 미곡상을 하던 목준상은 1919년 3월 3~4일경 『매일신보』 신문 기사에서 경성 및 각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11일 평택 장날에 역 앞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운동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어서 오후 5시경 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이도상(李道相), 한영수(韓泳洙), 심헌섭(沈憲燮)등과 함께 선두로 소리를 내어 선창을 하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날 운동을 주도하였던 13명은 일제에 의해 검거되었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목준상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5일 경성복심법원, 5월 31일 고등법원의 판결에서 기각되었다. 1998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6763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13報)」(1919.03.12.),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352쪽

『매일신보』 1919.03.25., 3면, <騷擾事件의 後報>

국가보훈처, 「공적조서(목준상)」

「목준상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4.11., 경성복심법원: 1919.05.05., 고등법원: 1919.05.31.).

사진 민응환 閔應煥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평택동)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 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1일 당일은 장날이었고 평택역전 사거리에 모인 약 150명의 사람들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응환은 사건 직후 검거된 13명 중의 한 사람으로 19일까지 경찰에 의해 심문을 받고, 동월 20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 이도상·심헌섭·목준상·한영수의 판결문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불기소, 혹은 면소로 석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자료

金正明 편, 高제6763호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13報)」(1919.03.1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 352쪽

『매일신보』 1919.03.25., 3면, <騷擾事件의 後報>.

「목준상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4.11., 경성복심법원: 1919.05.05., 고등법원: 1919.05.31.).

사진 박봉석 朴鳳奭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북면 가곡리 /
이명 新井鳳奭 형량 -
생몰년도 1926.09.02.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북면 가곡리(현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 사람이다. 해방 직전 이종필 등과 함께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해방 후 평택민청에서 이종필(李鍾弼)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5년 2월 8일 평남 평원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3월 23일 신문조서가 작성되었으며, 동년 5월 2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 판결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이종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해방 후 1946년 10월 이종필, 김경(金卿) 등이 간부로 있는 평택민청에서 함께 활동하였다가 체포되어 1946년 12월 21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948년 12월 동대문경찰서에서 포고령 위반으로 구류 29일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신분장지문원지」.

『독립신보』 1946.12.24., <평택사건의 이종필 등 기소>.

사진 박사원 朴四遠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87~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현 평택시 통복동) 사람이다. 1919년 3~4월 평택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사망하였는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사진 박성백 朴成伯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449 /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449
이명 朴鎬成 형량 징역 1년
생몰년도 1890.04.04.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봉남리 3·1운동 주도자로 마을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천도교인이 많은 봉남리에서는 3월 31일 대규모 인원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봉남리 449번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박성백은 김봉희(金鳳熙), 최구홍(崔九弘), 유동환(柳東煥), 전영록(全榮祿), 유만수(柳萬壽)와 함께 손병희 등이 제창한 조선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오후 4시경부터 6시경까지 사전에 만들어 놓은 태극기 30장을 가지고 나와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주민들과 함께 국기를 흔들며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관 주재소 앞 등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매일신보』에 의하면 면장을 끌어갈 정도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자동차를 몰고 현장에 가서 진압을 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17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박성백은 이에 1919년 5월 9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여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1919년 8월 7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은사로 감형되어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관련자료

「박성백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5.09., 경성복심법원: 1919.06.21., 고등법원: 1919.08.07.).

『매일신보』 1919.04.03., 3면, <면장을 끄러가>.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박호성)」

사진 박옥동 朴玉童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촌리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178 (현 평택시 죽백동)
이명 - 형량 징역 2년
생몰년도 1900.10.05. ~ 1949.04.05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안성군 원곡면 내촌리가 본적으로 안성군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제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방화에 가담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4월 1일 오후 8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오후 9시 30분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박옥동은 1,000여명의 군중과 원곡면 외가천리의 면사무소 앞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이어 그는 면장을 선두로 세우고 양성면으로 가서 시위자들과 함께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우편소를 파괴하기 위해 돌을 던졌다. 특히 박옥동은 양성면의 면사무소에서 서류를 훼기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박옥동은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박옥동 판결문 (고등법원 1920.03.22., 경성지방법원 1920.08.10., 경성복심법원 1921.01.22.)

『동아일보』 1920. 07.23, 3면, <今日公判開廷되는 安城事件豫審决定書>

『매일신보』 1919. 08.10 3면, <安城의 崔殷植等 百二十六名豫審終決決定>

『매일신보』 1921. 01.23 3면, <安城事件 122명의 공소판결 언도]피고 등의 각 處刑, 제일 중한 것이 징역 12년 구류 일수로 형을 마치고 출옥할 자가 매우 많이 있더라>

사진 박용규 朴容圭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 /
이명 朴乙童 형량 -
생몰년도 1885.02.02. ~ 미상 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현 평택시 지산동) 사람이다. 1900년 경부터 경성(京城)에서 프랑스인의 휘하에서 일하였다. 그는 1907년 3월 노동을 목적으로 중국 텐진(天津)으로 건너가 그 프랑스인이 운영하던 대풍양행(大豊洋行)에서 근무하면서 항일사상을 갖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한인이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 물품을 쓰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국내와 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11월 텐진의 자신의 집에서 만화회(挽河會)를 조직하고 박도일(朴道一), 조발제(趙發濟), 김태석(金泰錫)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관련자료

『국외용의조선인명부』, 270쪽. 「선인비밀단 挽河會에 관한 건」(1915.12.09.),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부-재만주의부』 5.

사진 박용업 朴龍業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68 (현 평택시 죽백동) /
이명 元西 형량 징역 3년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2천여 명이 참가한 원곡면·양성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면사무소가 있던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의 양성면 경찰관주재소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귀가하던 1천여 명의 양성면민을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루어 양성면 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지에서 시설을 훼손하고 집기를 파손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박용업은 원곡면과 양성면의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규동, 전수만, 안철재, 최찬섭, 이성렬 등과 함께 일본인 외리여수의 집에 들어가 동인 소유의 상품을 파훼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박용업은 1920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201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국가보훈처, 「공적조서(박용업)」

「박용업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사진 박인종 朴仁鍾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북면 야막리 56 / 만주국 신경시 吉野町 3丁目 6
이명 新井仁鍾 형량 징역 1년이상 3년이하
생몰년도 1922.12.28.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북면 야막리(현 평택시 진위면 야막리) 사람이다. 그는 수원예술호연구락부에 가입하여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박인종은 1938년 10월경 진위군 북면 공립보통학교 5학년을 다니다 중도 퇴학한 후 수원읍 화신연쇄점과 근등인쇄소 등에 고용되어 노동자로 일하였다. 1939년 12월 20일경 맹승재의 임시 거처에서 최용범의 권유로 수원예술호연구락부에 참가하고, 이들과 함께 만주국에 건너가 조선의 독립 및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키로 협의하였다. 수원예술호연구락부는 최용범, 김길준, 맹승재, 홍종철, 강성문, 최태종, 용헌식, 차준철 등 수원 일대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시킬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로, 그 목적은 1. 서로 목적수행을 위하여 단결을 공고히 하고 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 2. 서로 비밀을 지킬 것 3. 서로 일본인을 배척할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을 취하려 하였다. 그는 1941년 3월 21일 경 만주국 신경(新京)으로 건너가 찻집에 고용되어 일하면서 수원예술호연구락부의 목적을 수행하려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42년 7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에 참가하고 그 목적의 수행을 위해 노력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년 이상 3년 이하의 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3년 8월 2일, 혹은 1945년 8월 2일 출옥하였다.

박인종(1) 박인종(2)
박인종(3) 박인종(4)
관련자료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불온계획과 불경 및 조언비어사건에 관한 건」, (경성지방법원검사국 : 1941.10.07.)

「박인종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신정인종판결문」,(경성지방법원 : 1942.07.27.)

사진 박재훈 朴在勳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석정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0.06.17 ~ 미상 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애국장
위군 송탄면 서정리(현 평택시 서정동) 사람이다. 천마산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에서 1920년 3월 사이 평북 의주군(義州郡)에서 최시흥(崔時興) 등이 조직한 천마산대(天摩山隊) 대원으로 활동하였고, 1929년 음력 3월 길림성(吉林省) 성내(城內)에서 정의부(正義府) 교양부장 이동림(李東林)의 권유로 정의부에 가입하여 교양부 비서로 근무하였다. 1929년 4월 만주 일대의 독립군 단체인 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정의부(正義府)가 하나로 통합하여 남만주 일대의 혁명군정부인 국민부(國民府)를 창립하자,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에서 국민부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9월 27일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 선거에서 외무집행위원(外務執行委員)으로 선임되었고, 음력 11·12월 중 유하현(柳河縣) 대사탄(大沙灘)과 환인현(桓仁縣) 이호래(二戶來) 등을 순회하며 국민부의 이념을 선전 강연하였다. 1930년 5월 국민부 군대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소속 임기홍(林基弘)·조영화(趙永化)·최병환(崔炳煥)·임우송(林宇松)·사병익(史秉翼) 등 5명과 함께 신의주 대안(對岸)에서 체포되었다. 1932년 6월 2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1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박재훈 판결문」 (平壤覆審法院:1932. 9. 29)「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每日申報』, 1930.07.20., 1932.06.24., 1932.07.01.

『東亞日報』, 1932.06.25., 1932.07.02.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76, 486쪽. 14, 914쪽.

『독립운동사』 5, 1973, 586쪽.

사진 박정식 朴正式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 552
이명 - 형량 징역 2년 6월
생몰년도 1882.07.06. ~ 1957.02.15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현 평택시 월곡동) 사람이다. 농업에 종사하던 박정식은 1919년 4월 1~2일 양성면·원곡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평택지역 만세시위 중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또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인원만 이미 천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이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날 오후 10시 경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앞서 결의한 대로 양성면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안의 서류, 집기들을 모두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도 부쉈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이러한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안성사건’, ‘안성군 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지역 과격한 3·1운동의 하나의 사례로 여러 차례 신문에서 보도되었다.
특히 박정식은 박옥동, 이상신, 이종만과 함께 양성면의 우편소에 돌을 던지고 우편소 내 비치 서류를 훼기하는 활동을 하였다. 다음 날 새벽 원곡면 사무소로 가서 이미 불타고 있는 사무소에 판자를 뜯어 넣어 불길을 거세게 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박정식은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2년 6개월 받았다. 1977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金正明 編, 高第9808號 「極秘 朝鮮各地の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35報)」(1919.04.02.) , 『朝鮮獨立運動 Ⅰ』, 1967년, 488쪽. 국사편찬위원회,

「신문조서(박정식)」,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23권, 1986.

국가보훈처, 「공적조서(박정식)」

「박정식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8.10., 경성복심법원: 1920.01.22., 고등법원: 1920.03.22.)

사진 박창훈 朴昌勳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율북리 / 경기도 경성부 무교정 11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15 ~ 미상 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청북면 율북리(현 평택시 청북면 율북리) 사람이다. 경성(京城)의 보성고등보통 학교 학생으로 학생운동전위그룹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으로 권익수(權益洙), 이몽태(李夢泰)와 함께 보성고보 4학년생 지영갑(池永甲)이 이끄는 좌익학생운동전위그룹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사회과학서적의 학습과 시사문제의 연구·비판을 통해 사회의식과 계급의식을 형성한 후 이를 전파하여 동지를 획득하고 조직을 확장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의 감시와 관찰을 당하고 있었다.
관련자료

「학생운동 전위조직에 관한 건」(1932.12.16.), 『사상에 관한 정보 2』.

사진 방중삼 方仲三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 팽성 신궁리 / 경기 진위 팽성 신궁리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85 ~ (1919.03.01.)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팽성면 신궁리(현 평택시 팽성읍 신궁리) 사람이다. 1919년 3월 평택의 독립만세운동 당시 총을 맞고 순국하였다고 한다.

※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에 따르면 3월 1일 신궁리에서 총살되었다고 한다. 이 일자는 음력이거나 기억의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