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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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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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만세운동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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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은 전국적으로 볼 때 유일하게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평택지역은 서울보다 10여 일 늦은 3월 9일 첫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5월 10일까지 약 2개월 동안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03.09 평택지역에서 처음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된 곳은 현덕면으로, 3월 9일 밤 각 마을마다 일제히 산에 올라가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다. 현재의 평택호 배수갑문에 위치한 계두봉(鷄頭峰)을 비롯해 옥녀봉, 고등산 정상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03.10 현덕면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오성면에서도 3월 10일 주민들이 평야와 산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했으며, 같은 날 청북면에서도 토진리 오봉산과 마루산 정상에서 신포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다.
03.11 이도상, 목준상, 심헌섭, 한영수, 안종철, 안충수 등의 주도로 평택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이도상은 3월 5일경 서울과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한 후 11일 오후 5시경 평택역 앞에서 장날에 모인 군중을 향해 만세를 선창한 후 군중을 선동하였고, 이 자리에 함께 있던 목준상, 심헌섭, 한영수, 민응환 등이 이에 동조하여 군중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03.31 이후 한동안 진정됐던 평택의 만세운동은 3월 31일 현재의 진위면인 북면 야막리와 봉남리에서 또다시 전개됐다. 야막리는 천도교 진위교구가 있는 곳으로 천도교인들이 많았다. 교인들은 박창훈의 주도로 북면사무소가 있는 봉남리 천도교인들과 합세해 500여 명의 시위대를 형성한 후 오후 4시경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을 끌어내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만세시위에서는 박성백, 최구홍, 유동환, 전영록, 김봉희 등이 미리 만든 태극기로 시위대의 만세를 독려했고, 이들의 주도로 북면사무소와 봉남리 경찰서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른 후 각 마을로 행진했다.
04.01 평택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하게 3,000여명이 참가하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4월 1일 만세시위는 이날 밤 9시 50분경 현재의 평택시 남부도시지역인 병남면 평택역 서쪽 약 1㎞ 떨어진 곳에서 시작해서 각 지역의 산 정상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현재의 팽성읍지역인 서면과 부용면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평택으로 이동하다가 군문동 평택교 부근에서 만세를 불렀고, 송탄면과 고덕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진행했다. 이처럼 평택 읍내를 비롯해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자 진위경찰서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면서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밤 12시경에야 만세시위가 잠잠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주민 4명이 희생됐으며, 부상자가 10여 명에 달했다. 이어 일제 경찰은 야간출입을 금지시켰고, 일본인 상점의 주인들은 다음날부터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고덕면에서는 율포리 주민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시위를 진행했다. 이날 청북면에서는 안육만과 김원근이 시위를 주도했으며 이에 호응해 최만화, 안희문, 황순태, 정수만, 홍기성 등은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또한 북면 은산리에서는 정경순과 최선유의 주도로 주민 30여 명이 모여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부른 후 봉남리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계속했다. 일제는 이날의 평택 만세시위를 안성의 양성과 원곡만세시위, 수원군 장안면과 우정면 면사무소 습격시위 등과 함께 ‘가장 광포(狂暴)한 것’으로 인식했다.
04.02 서탄면과 송탄면, 오성면, 북면 등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서탄면에서는 윤기선 면장의 주도로 400여 명이 면사무소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송탄면에서는 이날 밤 10시 독곡리를 비롯해 500여 명이 각 마을마다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오성면에서도 안중리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이날 북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진행됐다.
04.03 오성면에서 김용성, 공재록, 이사필 등은 주민들과 함께 봉오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시위를 했다.
이날 평택 관내 각 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04.09 이후 1주일간 잠잠하던 만세시위는 4월 9일 고덕면과 10일 서탄면에서 다시 점화됐다. 4월 9일 고덕면에서는 자위단원 8명과 일본군인 8명이 만세시위 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한 현장 조사활동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인 밤 8시경,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만세를 불렀고,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쏜 총에 주민 6~7명이 사망했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급박한 사태가 발생했다.
04.10 서탄면 금암리에서는 앞서 4월 2일에 있었던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 조사를 진행하던 일제 경찰관에게 주민들이 실력행사로 대응했다. 주민 40여 명이 경찰관을 포위하고 돌을 던졌으며, 이어 주민들이 주재소를 습격하려고 하자 주재소 경찰관은 총을 쏴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이때도 주민 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며, 이밖에도 이날 북면 사리와 수월암리에서는 주민들이 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05.10 평택에서의 마지막 만세시위는 5월 10일 서해안 일대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치열했던 평택 3·1운동의 역사적 위상은

첫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평택의 만세운동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안성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입니다.

셋째

일제가 “가장 광포(狂暴)한 만세시위”로 평가처럼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입니다.
1959년 발행된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3·1운동에 참가한 평택 주민은
모두 22회에 걸쳐 6,000여 명이었으며,
사망 64명, 부상자 174명, 일제 경찰에 채포된 주민이 257명이나 됩니다.
또 안성의 원곡·양성 만세시위에도 적지 않은 평택 주민이 참여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99년 전 평택 3·1만세운동은 ‘평택인’으로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드려낸 가장 뜻깊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