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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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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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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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두분 張斗分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합정리 /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 1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8~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합정리(현 평택시 합정동) 사람으로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에 거주하였다. 1932년 6월 정상규(鄭祥奎)와 이봉재(李鳳宰) 등이 조직한 조선공산당경기도전위동맹준비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1일 죽산 소재 농우학원의 교사 정상규는 농우학원의 교사 이봉재와 함께 조선공산당공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학생들에게 사회교육을 표방하고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강사회, 자치회, 파이어니어부를 조직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런데 이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동년 6월 조선공산당공작회를 조선공산당경기도전위동맹준비회로 발전시키고 조직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장두분은 조선공산당경기도전위동맹준비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1932년 7월 경 체포되어 수사를 받았으나 1932년 8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관련자료

「秘密結社 朝鮮共産黨 京畿道前衛同盟準備會 檢擧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검사국, 1932.09.02.).

「各種運動情況, 昭和 7年 下半期後의 重要事件 檢擧, 비밀결사 朝鮮共産黨京畿道前衛同盟準備會 檢擧」(경성지방법원 검사국, 1934).

사진 전영록 全英祿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 183 /
이명 全榮祿 형량 징역 1년
생몰년도 1900.12.29 ~ 1967.07.10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사람이다. 1900년 태어났다. 그는 진위군 북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전영록은 박성백·최구홍·유동환 등과 함께 자신의 마을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31일 마을에서 미리 만들어 두었던 태극기 30류를 꺼내어 거주하는 동리 주민들과 함께 나눠주었으며, 태극기를 흔들며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진위군 북면 사무소 앞, 경찰관주재소 앞 등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각 동리를 행진했다. 그러한 이유로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상고하였으나 1919년 8월 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소위 은사(恩赦)로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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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전영록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09., 경성복심법원: 1919,06,21.) 金正明 편, 『朝鮮獨立運動』Ⅰ, 1967년, 530쪽.

사진 전창기 全昌基
본적/주소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108/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국내항일(평택노농협의회)
포상훈격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평택동) 사람이다. 1932년 평택노농협의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평택노농협의회는 송탄면 지산리 출신으로 평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사범학교에서 수학하던 양반 출신인 이종필(李鍾弼) 등이 1932년 중반 평택에 조직한 사회주의적 농민단체이다. 전창기는 이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1932년 11월 26일 소위 ‘평양사범학교 학생적화사건’의 용의자 이종필이 검거된 다음날인 11월 27일 평택리의 이희수(李喜秀)와 함께 체포되었다. 전창기는 경기도경찰부의 조사를 받고 1932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되었으나 1932년 12월 26일 이희수와 함께 불기소로 방면되었다.
관련자료

『동아일보』 1932.11.30.; 12.13.; 12.14.; 12.20.;

『동아일보』 1932.12.20., 2면, <평사사건관계 7명 금조 송국>.

『동아일보』 1932.12.28., 2면, <평사적화생 7명 예심에, 10명은 불기소로 방면>.

사진 정경순 鄭庚淳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북면 은산리 304
이명 - 형량 징역 6월
생몰년도 1892.02.25.~1959.03.22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진위군 북면 은산리(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진위군 은산리의 3·1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정경순은 전국에서 발발한 3·1운동이 평택지역까지 확산되고 주변 마을에서도 만세시위가 이어지자 정재운, 정문학과 자신의 마을인 은산리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다. 그는 은산리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들은 마을에서의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뒷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근의 봉남리 일본 순사 주재소까지 만세시위행렬을 이끌고 가서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지속했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에서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2개월 뒤인 1919년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로 형이 감해졌다. 2000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정경순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경성복심법원: 1919.07.05.)

사진 정덕근 鄭德根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근내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4.~1919.03.06.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팽성면 근내리(현 평택시 팽성읍 근내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병남면 평택리 평택역 앞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의 총을 맞고 순국하였다.
정덕근은 1919년 4월 1일 자신의 마을인 진위군 부용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주민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들은 부용산에 올라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그날 밤 병남면 평택리로 이동하여 10시 반경부터 새벽 2시까지 평택역 주변에서 3,000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그밖에 경상자도 있었다. 정덕근은 이날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의 발포로 순국하였던 것 같다.

※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에 의하면 1990년 3월 6일 근내리에서 타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사진 정문학 鄭文學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북면 은산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북면 은산리(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사람이다. 1919년 은산리에서 3·1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고 한다. 정문학은 전국에서 발발한 3·1운동이 평택지역까지 확산되고 주변 마을에서도 만세시위가 이어지자 정재운, 정경순과 자신의 마을인 은산리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다. 그는 은산리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들은 마을에서의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뒷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근의 봉남리 일본 순사 주재소까지 만세시위행렬을 이끌고 가서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지속했다고 한다.
관련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2: 삼일운동사(상), 1971, 171쪽.

사진 정세근 鄭世根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517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74.03.24. ~ 1919.07.01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국장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현 평택시 청북읍 백봉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진위군(振威郡) 부용면(芙蓉面, 현 평택시 팽성읍)과 4월 1일 밤 병남면 평택리 평택역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진위군 부용면의 주민들은 4월 1일 부용산에 올라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병남면 평택리에 가서 10시 반경부터 새벽 2시까지 평택역 주변에서 3,000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그밖에 경상자도 있었다. 정우근은 이날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의 발포로 순국하였다. 2014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사망 일시가 『3·1운동 시 피살자명부』에는 1919년 3월 6일,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919년 7월 1일로 되어 있음.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三一運動秘史』(李炳憲, 1959), 881쪽.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9(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95쪽.

사진 정수만 鄭水萬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517 /
이명 - 형량 징역 6월
생몰년도 1900.02.29.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현 평택시 청북읍 백봉리)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20세의 농업에 종사하던 청년으로 4월 1일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의 행길에서 오성면 안화리에 사는 안육만과 김원근이 “이 동리에서는 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빨리 나와서 부르라”는 말에 호응하여 최만화, 안희문, 황순태, 홍기성 등 마을 사람 수십명과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인해 체포된 정수만은 1919년 5월 16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관련자료

「정수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05.16.).

사진 정영실 鄭榮實
본적/주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5 ~ (1920.08.)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일대에서 이유석·홍창섭·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4월 1일 오후 8시경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던 원곡면 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일본인 면장을 끌어내어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고, 양성면과 원곡면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자를 축출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 9시 30분경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9시 50분경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에서 행진하여 오던 만세시위대와 합세하여 오후 10시경 다시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 때 그는 짚이 없어서 주재소를 방화시키기가 어려움을 알고, 주재소에서 5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짚을 가져다가 홍근배(洪根培)와 함께 처음으로 건물과 기물에 방화하여 다른 군중들로 하여금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사기가 오른 만세시위 군중과 계속적으로 양성 우편소와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습격하고, 양성면 사무소의 건물과 기물을 파손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까지 양성면 일대에서 시위를 계속하다 원곡면으로 되돌아 와서, 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달려가 서류와 집기류를 불태워 버리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영실은 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1920년 8월 사망하였다고 한다.
※ 『3·1운동시 피살자명부』』에는 1920년 8월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관련자료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사진 정우근 鄭友根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근내리 92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895.02.09. ~ (1919.05.22.)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국장
진위군 팽성면 근내리(현 평택시 팽성읍 근내리)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진위군(振威郡) 부용면(芙蓉面, 현 평택시 팽성읍)과 4월 1일 밤 병남면 평택리 평택역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진위군 부용면의 주민들은 4월 1일 부용산에 올라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병남면 평택리에 가서 10시 반경부터 새벽 2시까지 평택역 주변에서 3,000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날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그밖에 경상자도 있었다. 정우근은 이날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의 발포로 순국하였다. 2014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3·1운동시 피살자명부』』에는 3월 6일,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5월 22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관련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3·1운동 시 피살자명부』(1953), 국가기록원 소장.

『三一運動秘史』(李炳憲, 1959), 881쪽.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9(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95쪽.

사진 정우진 鄭宇鎭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25.01.10. ~ 1958.08.04 계열 중국방면 (광복군)
포상훈격 애족장
진위군(현 평택시) 사람이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1941년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대표적인 사업이 대한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부대 편제를 갖추었다.
광복군은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중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는데, 임시정부의 선전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기 위한 광복군의 선전활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복군의 창설과 더불어 ‘당면전략’을 통해 한국민족의 항일투쟁에 대한 대외적인 선전과 병력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선전을 병행하게 되었다.
정우진은 1944년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파단을 조직하여 각 지역에 파견하기로 했는데, 정우진은 그 중에서 반부(蚌埠)지구 특파단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반부지구 특파단은 제3지대 창군요원이던 김국주가 단장, 부단장에 문웅명(일명 문수열)이 임명되고 단원에는 정우진(鄭宇鎭), 장일제(張一題), 홍종석(洪鍾石)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관련자료

「초모공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 1975, 418쪽.

「광복군 김문택의 수기」:광복군4,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사진 정인옥 鄭寅玉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북면 / 경기도 진위군 북면
이명 金漢福, 金斗山 형량 -
생몰년도 1879.12.08. ~ 1949.12.06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애국장
진위군 북면(현 평택시 진위면)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후 가산을 정리하여 1919년 음력 7월 김한복(金漢卜)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경성부 팔판동의 신덕영(申德永)으로부터 권총 2정과 탄환, 그리고 독립신문을 받아 경북 영주군 부석면 용암리 김규수로부터 723원을 받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부하였다. 그리고 1921년 12월까지 경상북도 각 군으로 돌아다니면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상당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2년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고,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여 1922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훈격이 변경되었다.
※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출신지가 경북 문경, 생몰연대가 1875.12.08.~1950.01.24.로 되어 있다. 정인옥의 판결문에는 본적 및 주소가 경북 문경군 문경면 하초리로 되어 있다. 정인옥의 처 나주 임씨의 친정이 문경이어서 판결문에 정인옥의 본적 및 주소가 문경으로 기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자료

「정인옥 등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2.7.19.). 「정인옥 등 판결문」(공주지방법원, 1923.1.27.)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2004, 321쪽.

『동아일보』 1922.05.09.

『매일신보』 1922.10.31.

사진 정호근 鄭鎬根
본적/주소 강원도 강릉군 실리면 유동 /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76 (현 평택시 죽백동)
이명 來順 형량 징역 7년
생몰년도 1889 ~ 미상 계열 3.1운동
포상훈격 -
강원도 강릉에서 1889년 태어났으나 안성군 원곡면(현 평택시 죽백동)에서 생활하였다. 이명은 정래순(鄭來順)이다. 그는 원곡면 3·1운동을 주도하여 마을주민들로 하여금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하고 주재소를 파괴하고 우편소를 방화하는 등 격렬하게 일제에 항거하였다.
2천여 명이 참가한 원곡면·양성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다. 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3·1운동으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제의 관청은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고 많은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면사무소가 있던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오후 9시 반부터 동항리(東恒里)의 양성면 경찰관주재소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귀가하던 1천여 명의 양성면민을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루어 양성면 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지에서 시설을 훼손하고 집기를 파손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다음날 새벽 4시 원곡면으로 돌아와서 원곡면 사무소를 방화하고 해산하였다.
정호근은 1919년 4월 1일 원곡면 원곡읍사무소에서 만세시위운동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뿐만 아니라 양성면주재소에 침입하여 비치된 서류를 파기하고 우편소를 방화하는 데 가담했다. 이로 인해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죄로 징역 7년을 언도받았다.
관련자료

「정호근 검사신문조서」(1919.05.08.)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3;三一運動 XIII, 1995.

정호근 예심신문조서(1919.09.29.)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3;三一運動 XIII, 1995.

「정호근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0.08.10., 경성복심법원: 1921.01.22., 고등법원: 1920.03.22.).

사진 정희택 鄭凞澤
본적/주소 경기도 진위군 팽성면 도두리 18/
이명 - 형량 -
생몰년도 1902 ~ 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진위군 팽성면 도두리(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 사람이다. 1923년 4월경 정희택은 상해임시정부원이라 하며 충북 청주군 강내면 사곡리 이용묵(李容黙)의 장남 이중욱(李重旭), 청주군 강서면 현암리 이두영(李斗永)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려고 하다 발각되어 검사국에 취조를 받아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같은 해 6월 이상철(李相喆)이라는 가명을 쓰고 아산군 영인면 백석포리 이성필(李聖弼)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달라고 하여 군자금 100원을 조달하였다. 1923년 8월 경 천안군 성환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 1930년 1월 진위군 청북면 율북리와 천안군 성환면 등지에서 금전을 강탈하다가 체포되었는데 활동 내용의 성격은 확인되지 않는다.
관련자료

『조선일보』, 1923.08.28. 3면, <軍資募集員公訴棄却, 정희택은 기소되었다>.

『매일신보』, 1930.01.20., 2면, <진위군 강도 평택에서 잡혀>.

사진 조창원 -
본적/주소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보라리(생지, 본적) /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 165 (주소)
이명 - 형량 징역 1년
생몰년도 1916.02.15~미상 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보라리 사람으로 진위군 송탄면 지산리(현 평택시 지산동)에 거주하였다. 1944년 전시체제와 강제동원체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였다가 동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5년 3월 27일 출옥하였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조창원)에는 조창원의 주소지가 송찬면 和山里로 나오는데 이는 지산리의 오기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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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조선일보』, 1923.08.28. 3면, <軍資募集員公訴棄却, 정희택은 기소되었다>.

『매일신보』, 1930.01.20., 2면, <진위군 강도 평택에서 잡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