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만세운동
3·9만세운동
사적지
사적지(서부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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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봉오산 일대(위)와 현재 봉오산(아래).
1919년 오성면 학현리(현 안중읍 학현리) 일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관련 재판기록문에 따르면 4월 3일 밤 학현리 주민인 김용성·공재록·이사필이 12~13명의 주민들을 모아 봉오산에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는 이들을 체포하여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하였다.
평택시 사적지 가운데 정확한 지명이 드러나는 몇 안되는 지점 중 한 곳이며, 현재 안중출장소가 위치해 있다.
일제강점기 백봉리 일대(위)와 오늘날 백봉리(아래)
1919년 백봉리 일대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1일 밤 안육만과 김원근이 백봉리 도로에서 “이 마을에서는 어찌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빨리 나와 부르자”고 마을 주민들을 모아 최만화, 안희문, 황순태, 정수만 등 주민 수십명과 함께 만세를 연호하였다. 현재 마을은 너른 벌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별한 이정표나 공공기관 등은 없는 편이다.
그러나 3·1운동 당시 백봉리에는 청북면·고덕면을 관할하는 백봉리주재소가 있었다. 따라서 백봉리 주민들이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인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택시독립운동사』에 따르면 3월 10일 청북면 마루산의 봉화시위를 신호로 포승면 주민들 200여명이 대덕산 정상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경기남부 독립운동사적지』에서는 2001년 편찬된 『평택시사』에 지역주민들의 증언이 기록되었고, 이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고 하며 희곡리 산 55-56번지를 만세시위지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자료를 검토해본결과 『삼일운동비사』에는 3월 10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3월 10일 오성면은 평야를 위시하여 산간지대까지 일제히 만세를 불렀고 청북면은 토진리 뒷간과 마루산의 다수한 군중이 집합하여 만세를 불렀다.”
위 자료에는 포승면 또는 대덕산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또한 『평택시사』에서도 대덕산이 어떠한 근거로 만세시위지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따라서 대덕산에 관해 어떤 자료를 인용했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한 정확한 지점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네비게이션에 검색한 대덕산은 조사지점인 희곡리 산 55-56번지 일대가 아닌 희곡리와 방림리의 경계지점인 방림리 334-1번지 일대였다. 해당 지점에 방문한 결과 아래와 같이 표지가 붙어 있었다.
대덕산 정상이라는 표지.
오늘날 대덕산 일대 위성사진(위)와 일제강점기 대덕산 일대(아래)
기존 조사지와 현재 대덕산 정상 표지가 있는 곳은 거리상으로도 꽤 거리가 있다. 추정컨대 기존 조사에서 잘못된 지점을 비정하였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덕산이라는 지명이 현재 지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두 지점 모두 사료상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먼저 대덕산이 만세운동지였다는 것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필요해 보인다.
옥녀봉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모습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현덕면의 만세운동의 경우, 기존연구인 『평택독립운동사』의 경우 옥녀봉을 최초 집결지로 지목하고 있고, 『경기남부 독립운동사적지』에서는 계두봉을 최초 집결지로 지목하고 있으나, 두 연구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삼일운동비사』의 기록에는 “각 동리에서 일제히 산에 올라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계두봉이나 옥녀봉 같은 특정한 지점에서 모인게 아닌 각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산에 불을 피우고 제각기 만세시위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독립운동사적지 사이트 sajeok.i815.or.kr에서는 「경기남부 독립운동 사적지」의 자료를 토대로 독립운동사적지로 홍보하고 있다. 한편 계두봉이 아산만 방조제 확장으로 인해 사라짐에 따라 맞은편 왕자봉 현충탑 앞에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3월 22일 권관리·마안산·옥녀봉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조사결과 현재의 마안산과 일제강점기의 마안산의 위치가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3월 22일 만세운동에 대한 자료는 『삼일운동비사』에 현덕면 권관리에서 천도교인 10여명이 평택경찰서에 구금·고문당했다는 내용 만이 나와 있어 자료의 출처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따라서 현덕면의 최초 만세시위지가 계두봉이나 옥녀봉이냐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며, 오히려 3월 9일 현덕면의 주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신들의 마을 뒷산에 불을 피우고 만세시위를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오창선·이택화의 거주지 터와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일대(위)와 지적도 상의 본적지(아래)
오창선·이택화·안구현은 1920년 2월 18일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 김태연의 집에 가서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문서를 보이고, 모형 권총으로 위협하며 자신들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이라고 하여 군자금 100원을 모금하였다. 같은해 3월 10일 오전 2시경에 진위군 포승면 내기리 李敏和의 집에 가서 같은 방법으로 위협하였고, 3월 19일 이민화로부터 110원을 모금하였다. 이후 셋은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평택시 독립운동관련 조사지역 일람
지역구분 | 조사지명 | 당시주소 | 현주소 |
---|---|---|---|
남부지역 | 평택역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185 |
평택시 평택동 185 |
부용산 | 진위군 부용면 객사리·두 리 일대 |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두 리 일대 |
|
죽백동 일원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 평택시 죽백동 | |
진청학원 터 |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 477 |
평택시 통복동 477 | |
원심창거주지 터 | 진위군 서면 안정리 175 |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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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지역 | 봉남리 | 진위군 북면 봉남리 |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
은산리 | 진위군 북면 은산리 |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 |
야막리 | 진위군 북면 야막리 | 평택시 진위면 야막리 | |
금암리 | 진위군 서탄면 금암리 | 평택시 서탄면 금암리 | |
사리·수월암리 | 진위군 서탄면 사리·수월 암리 |
평택시 서탄면 사리·수월 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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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릉리 |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 |
황구지리 | 진위군 서탄면 황구지리 |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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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고가 |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646 |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646 | |
권익수거주지 터 | 진위군 북면 가곡리 313 |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 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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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지역 | 봉오산 |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
백봉리 |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 평택시 청북읍 백봉리 | |
대덕산 |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 |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 |
계두봉·옥녀봉 일대 |
진위군 현덕면 권관리·기 산리 |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기 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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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선·이택화 거주지 터 |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150/ 164 |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150/ 1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