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만세운동
3·9만세운동
사적지
사적지(북부지역)
남부지역 | 북부지역 | 서부지역 |
봉남리는 일제강점기 진위군 북면(현 평택시 진위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오늘날에도 면사무소가 소재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북면 일대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3월 21일 야막리·봉남리 주민 약 500여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장을 앞세우고 만세를 불렀으며, 3월 31일에는 유동환, 김봉희, 최구홍, 박성백, 전영록, 유만수 등이 봉남리 주민 400여명과 함께 미리 만들어놓은 구한국기 30매를 흔들며 북면사무소 및 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 북면 각 마을을 열을 지어 천천히 돌아다니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경기도 남부독립운동사적지』에서는 조사를 통해 현재 면사무소가 옛 면사무소터에 새로 증축되었음을 확인하였으며, 이 때 함께 만세를 부른 지점을 “북면주재소”로 파악하고, 현재 진위파출소가 옛 하북리주재소이자 북면주재소 자리임을 확인하였다.
북면사무소(봉남리)와 하북리주재소(하북리)
그런데 자료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봉남리에 주재소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동환 등이 봉남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다음날인 1919년 4월 1일 은산리 주민 정경순과 최선유, 정재운, 정문학 등이 은산리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를 할 것을 권유하여 은산리 뒷산서 만세를 외치고 이어 봉남리의 순사주재소까지 이동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관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하북리에는 주재소가 존재하지 않았고, 봉남리에 주재소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사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3·1운동 기간 중 봉남리의 주재소를 폐쇄시켰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1일 정경순과 최선유, 정재운, 정문학 등이 은산리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를 할 것을 권유하여 은산리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나아가 봉남리의 순사주재소까지 이동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경순은 마을 주민 정문학 등에게 나와서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방화하겠다고 하는 등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주민들에게 만세시위를 유도하였고, 정경순과 최선유는 각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기록문 상에는 “은산리 뒷산”이라고만 기술되어 있어 정확한 지점을 비정할 수는 없었으나, 현재 존재하는 은산1리 마을회관 뒤 야산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산리 주민들의 만세운동 추정 경로
현재 은산리 일대의 모습
야막리는 진위군 북면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 야막리는 약 30여호 정도였으며, 현재는 약 55호 정도이다. 야막리 주민들 또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19년 3월 21일 야막리 주민들이 봉남리 주민들과 함께하여 약 500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면사무소를 습격한 뒤, 면장을 앞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야막리 주민들의 만세운동 추정 경로
금암리는 서탄면사무소의 소재지로, 1919년 4월 2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대규모로 열렸다. 경성지방법원 「윤기선 판결문」에 의하면 서탄면장 윤기선이 4월 2일 오전 각 구장에게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문서를 발송하고 면사무소 앞 광장으로 주민 약 400명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1919년 4월 10일 금암리에서 주민 40여명이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총을 쏘아 해산케 하였는데 군중편에 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금암리 일대(자료 : 국토지리정보원)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경기남부 독립운동사적지』에서는 옛 서탄면사무소를 조사하 고 금암1리 401번지 일대를 서탄면사무소 터로 비정하였다. 주재소의 경우 회화리에 주재소가 있었다는 자료를 통하여 회화리주재소 터에 살고 있는 주민의 증언으로 고증하였다.
금암1리 마을회관 일대 사진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3·1운동 당시 서탄면에는 주재소가 없었고, 봉남리주재소가 관할한 것이 밝혀지면서, 서탄면민이 몰려간 주재소는 아마도 봉남리주재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리와 수월암리는 서탄면 북부에 있는 마을로, 서로 인접해 있으며 『삼일운동비사』에 따르면 사리와 수월암리에서는 4월 10일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다가 자진해산하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주동자 및 만세를 부른 특정한 장소에 대한 자료가 없어 해당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것만 일러둔다.
일제강점기 두릉리·계루지 일대(위), 현재 종덕초등학교 일대 모습(아래)
1919년 4월 1일 평택역을 비롯한 평택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고덕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삼일운동비사』에 따르면 이튿날 일경이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마을을 순찰하던 중 안재홍의 집을 수색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두릉리 주민들이 반발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경들이 주민들을 향해 발포, 주민 6, 7명의 부상하였다.
현재 황구지리 사진.
황구지리 소작쟁의 터는 1931년 11월 23일 금각리·황구지리 일대 소작인 40여명이 일본인 지주의 마름 坂本의 집에 이르러 채무이식 면제·마름의 色租 감하 등을 요구하였던 곳으로, 11월 26일 마름 坂本은 소작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서약서를 보냈다. 현재 소작쟁의 터로 추정되는 황구지리 90번지 일대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하다.
일제강점기 계루지 일대(위)와 현재 안재홍 생가 및 고가 일대(아래)
민세 안재홍이 살던 고가의 경우 오랜 기간 생가로 알려졌다가, 2017년 11월 민세학술대회에서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 대조를 통해 현 주소 계루지길 14-15가 안재홍이 태어난 곳으로 파악되었다. 해당 건물에 대한 보존작업에 착수한 상황이다.
현재 생가추정지에 걸린 현수막
안재홍 고가 앞 안내문. “생가”라는 부분이 아직 미수정되어 있다.
권익수 거주지 터(가곡리 313) 위성사진(위)과 일대 사진(아래)
권익수는 1899년 경기도 진위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고향인 진위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하여 포승면 희곡리의 이민백을 찾아가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왔고, 이로 인해 태 90대를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지속하여 1920년 7월 제령위반으로 체포당해 1922년 5월 출옥하였고, 이후에도 권태휘라는 가명으로 황태자 봉축식을 반대하는 경고문을 작성·배포하였다가 피체되어 1922년 11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3차례나 체포되어 징역형을 2번 선고 받았음에도 권익수는 독립운동을 지속하여 1924년 혁신단이라는 조직의 조사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평택시 독립운동관련 조사지역 일람
지역구분 | 조사지명 | 당시주소 | 현주소 |
---|---|---|---|
남부지역 | 평택역 |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185 |
평택시 평택동 185 |
부용산 | 진위군 부용면 객사리·두 리 일대 |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두 리 일대 |
|
죽백동 일원 |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 평택시 죽백동 | |
진청학원 터 |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 477 |
평택시 통복동 477 | |
원심창거주지 터 | 진위군 서면 안정리 175 |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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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지역 | 봉남리 | 진위군 북면 봉남리 |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
은산리 | 진위군 북면 은산리 |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 |
야막리 | 진위군 북면 야막리 | 평택시 진위면 야막리 | |
금암리 | 진위군 서탄면 금암리 | 평택시 서탄면 금암리 | |
사리·수월암리 | 진위군 서탄면 사리·수월 암리 |
평택시 서탄면 사리·수월 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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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릉리 |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 |
황구지리 | 진위군 서탄면 황구지리 |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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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고가 |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646 |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646 | |
권익수거주지 터 | 진위군 북면 가곡리 313 |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 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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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지역 | 봉오산 |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
백봉리 |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 | 평택시 청북읍 백봉리 | |
대덕산 |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 |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 |
계두봉·옥녀봉 일대 |
진위군 현덕면 권관리·기 산리 |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기 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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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선·이택화 거주지 터 |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150/ 164 |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150/ 164 |